2019 전시 결산 - 이기원

👩🏻‍💻2019 전시 결산📊 - ✍️이기원

 

1. 개인전(혹은 작품) 중 가장 좋았던 것

정희민 ‘그의 촉촉한 입안에서 당신이 서 있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캔버스에 아크릴, 375x678cm, 2019

 

정희민 ‘그의 촉촉한 입안에서 당신이 서 있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젊은모색 2019 : 액체 유리 바다>(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평소에도 정희민은 대체로 큰 사이즈의 작업을 선보여오긴 했지만, <젊은모색>에서 발표한 ‘그의 촉촉한 입안에서 당신이 서 있는 들판을 바라보았다’는 앞으로도 이런 크기의 작업을 또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큰 작업이었다. 캔버스 6개를 이어붙여 높이 약 3.75m에 폭은 약 6.8m에 달하는데, 왠지 ‘세로’ 대신 ‘높이’가 자연스러울 정도로 한 장의 그림이라기 보다는 설치작업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단순히 대형 작업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압도감만으로 이 작품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캔버스에 덧발라진 반투명의 미디엄을 통해 작품의 표면을 가까이에서 살펴볼 때의 경험과 충분히 먼 거리에서 작품을 볼 때의 경험이 다른 종류의 느낌/감상을 제공한다는 점이 정희민의 작업을 물감으로 그려진 2차원 이미지로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에서 작품의 물리적 크기를 최대치로 늘린 것은 그 자체에서 기대할 수 있는 효과도 있겠지만, 가까이서 볼 때와 멀리서 볼때의 경험의 차이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도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사족이라면, 층고 뿐 아니라 가시거리까지 확보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 정도 크기의 작품을 수용할 수 있는 전시공간이 아마 국내에선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란 슬픈 직감 때문인지, 유독 전시를 본 이후에도 자꾸 생각나는 작업이기도 했다.  

 

김경태<표면으로 낙하하기>(휘슬) 전시전경

EH(김경태) <표면으로 낙하하기>(휘슬)

작가의 첫 개인전이었으나 일반적인 ‘첫 개인전’과는 결이 사뭇 달랐다. 그 동안 여러 기획전에서 선보인 커미션 작업들이 전시의 맥락에 맞게 주어지거나 선택된 사물을 작가가 연구해 온 방식으로 촬영/제작하는 것에 가까웠다면,  이번 개인전은 작가 자신의 관심사로 최대한 파고들어가는 방식이었다. 특히 사진 작품을 전시의 형태로 선보이는 과정에서 당연하게 넘어가거나 간과된 부분까지 작업 안에서 짚어내면서 광학 원근법과 사진 그리고 눈으로 ‘본다’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좀 더 다른 차원에서 고민하게 했던 점이 유의미했다. 관련한 내용은 리뷰(https://t-504.tistory.com/75)를 참고할 것.

2. 기획이 인상깊었던 전시

 

파일드 <Filed SS 2020>(퓨처 소사이어티)

파일드가 첫 단독 전시 <Field SS 2020>에 선보였던 작품들은 사진을 얼마나 다양한 지지체/사물/재료에 프린트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이를 n차 가공하는 방식-자신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찍은 사진을 티셔츠에 프린트한 후 이를 착용하고 사진을 찍고, 그 사진으로 사진책을 만드는-으로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티셔츠, 바지, 자켓과 같은 의류의 경우에 이를 앞, 뒷면만 존재하는 2차원 지지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착용했을 때 ‘옆면’이 만들어진다는 것까지 고려하여 사진을 3차원 오브제에 스킨처럼 덧씌우듯 작업을 설계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또한 전시장 역시 (전시제목이 암시하듯) 의류 편집샵이나 쇼룸의 문법으로 구성하면서 마치 전시장 전체가 ‘Filed’라는 가상의 패션 브랜드의 팝업스토어처럼 하나의 설치 작업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 전시가 (적어도 국내에선) ‘사진’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전시의 어떤 스펙트럼에서 가장 끝에 위치했다고 생각한다.

 

<잠금해제>(민주인권기념관) 기획 : 김상규

‘남영동 대공분실’으로 더 유명하면서 ‘민주인권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열린 전시였다. 특히나 이곳이 설계단계에서부터 치밀하게 ‘고문실’의 용도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다른 어떤 유적/장소와 비교하더라도 공간의 힘이 훨씬 강력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는 장소라는 걸 감안하면 이 공간 위에 얹혀진 전시가 얼마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금해제>는 전시 공간과 작품이 힘겨루기를 하도록 밀어붙이기 보다, 작품들이 대공분실의 건축적/기능적 요소나 이 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방식의 작품들을 통해 (덕분에 다소 자극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대공분실을 ‘견학’하는 단계 이상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는 점에서 좋은 전시라고 봤다. 여기서의 기획은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려 하기보다는 공간과 작품(그리고 민주인권기념관) 사이의 관계를 적절히 조율했다는 점에서 그 힘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보스토크 17호 <다크 투어리즘>의 ‘전시 셔틀’ 코너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3. 올해의 발견 

마테리알 웹사이트 캡처 (ma-te-ri-al.online)

 

마테리알 (온/오프라인 비평 플랫폼) 

일단 무엇보다도 “마테리알은 스루 패스로서의 비평을 지향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개글이 무척 강렬해 한동안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에 대해 생각했다. 비록 창간 기념 토크 프로그램 ‘비평의 비평’에는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추후 웹사이트(ma-te-ri-al.online)에 올라온 토크 발표문 읽어보고 창간준비호, 창간호까지 구해 읽어 보았다. 물론 나는 영화나 무빙이미지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아 개별 글/발표문에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이를 소화해 낼 순 없었지만, 적어도 해당 글과 행사 이후에 트위터를 통해 올라온 반응/피드백을 보면서 <마테리알>의 메타비평이 ‘유효슈팅’을 기록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늘 메타비평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었지만, 정작 결과물은 내놓지 못해 (한 달에 이틀 정도는) 자책감을 느끼는 입장에서, <마테리알>의 등장은 그 자체로 자극이 되었고, 동시에 앞으로 이들이 또 어떤 스루패스를 선보일지 기대가 된다. 

4 올해 인상깊었던 토크 / 전시연계 행사 / 프로젝트 / 출판(도록, 작품집)

 

 

정희승 <기억은 앞면과 뒷면을 가지고 있다> (헤적프레스, 디자인 박연주)

먼저 이 책은 정희승이 2018년 광주비엔날레 <한시적 추동>섹션에서 발표했던 ‘기억은 앞면과 뒷면을 가지고 있다’ 시리즈의 전시 이후에 촬영한 작품들까지 추가해 만든 사진책이다. 전시에서 이 작품들은 커다란 사이즈와 클램프를 활용한 디스플레이 덕분에 마치 하나의 풍경이나 촬영장소를 떼어 옮겨온 듯한 설치물처럼 배치됐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책에서 작품들을 보여주는 방식은 전시와는 사뭇 달랐다. 책은 길쭉한 사진에 맞춘 날렵한 판형을 따라 단 두 종류의 절제된 레이아웃이 오른쪽 페이지로만 배치돼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사진 한 장 한 장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과정에서 사진책 속 작품들은 카메라를 통해 재현된 어떤 공간/장면으로 제시되기 보다는 하나의 독립된 이미지처럼 기능하면서 작품 자체의 조형성에 주목하게 한다. 

 

이상혁, 최다함 <리플렉션 스터디> 도록 (더플로어플랜, 디자인 신덕호)

이상혁의 설치 작품을 촬영한 최다함의 사진과 거울 설치물로 구성된 <리플렉션 스터디>(원앤제이플러스원)는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두 작가의 ‘반사에 대한 연구’를 보여준 전시였다. 전시는 크게 두 단계로 거울과 이에 반사된 이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먼저 (거울을 주재료로 하는)이상혁의 작품을 아주 세심하고 정교하게 촬영한 최다함의 사진이 있고 여기에 최다함의 사진과 동일한 비율/크기로 제작된 거울이 배치된다. 주변 환경/색상과 관계하는 이상혁의 거울 오브제들은 최다함의 사진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다시 이 사진들은 전시장에 거울과 함께 배치되면서 다른 층위에서 반사된 이미지를 등장시킨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관람객은 작품과 거울 사이에서 자신의 휴대폰 카메라를 통해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이들의 ‘연구’에 개입/관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전시가 아닌 도록으로 <리플렉션 스터디>를 꼽은 이유는 이 도록과 여기에 실린 사진이 그 자체로 아름답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도록과는 분명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철제본으로 유광 은색지(거울지)를 내지 중간 중간에 삽입하고 이에 맞춰 사진을 배치하면서 작품과 전시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거울’을 지면에서 구현한 이 책은 도판과 전경 사진이 실린 전시 기록물에 머물지 않고, 지면이라는 또 다른 조건/장소에서 작품과 전시를 작동시킨다.

 

5. 올해의 물음표 

사이먼 데니 ‘블록체인이란 무엇인가?’, 2016, HD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분, <불온한 데이터> 전시전경

사이먼 데니 ‘블록체인이란 무엇인가?’ <불온한 데이터>(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불온한 데이터>는 여러모로 의문이 많은 전시였다. 전시 제목과 기획의도에서 이야기하는 ‘데이터’가 어떻게 전시장의 로봇 청소기, 로봇 공 작업과 연결되는지부터, 제법 러닝타임이 길었던 영상 작품들을 전시장 한 벽에 다닥다닥 배치해서 관람객 동선과 겹치게 만들었는지, 하다못해 전시는 4차 산업 혁명이나 블록체인 같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제목 레터링은 레트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비트맵 폰트를 쓴 것인지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의문은 사이먼 데니의 영상 작업 ‘블록체인이란 무엇인가’였다. 이는 정확히 3분짜리 영상으로 모션그래픽 템플릿에서나 볼 법한 스타일로 블록체인의 개념을 설명해주다가 끝나버린다. 뭔가 놓친 부분이 있나 싶어 다시 봤는데도, 더 설명하거나 짚어낼 요소가 없었다. 그래서 이 작업이 스스로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진 않았고, 작가의 다른 작품을 보조하거나 부연하는 역할로 만들어진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다가 이 작업이 문득 떠올라 작가 홈페이지(http://simondenny.net/)에서 작가의 개인전 <Blockchain Future States>(Petzel Gallery, 2016, http://www.petzel.com/exhibitions/simon-denny3)의 자료를 찾았다. 전시전경 사진에서 해당 영상이 상영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블록체인이란 무엇인가?’는 독립적인 작품이 아니라 전시의 부속물 내지는 공간 디자인의 일부처럼 보인다. 게다가 유튜브(https://youtu.be/gvGiyWmneh0)에 올라가 있는 이 영상을 올려둔 게 작가가 아니라 영상을 제작한 Mynd라는 업체라는 사실도 의심에 확신을 더해 주었는데, 이쯤되고 나니 도대체 무엇이 작품인지 또는 무엇이 작품 아닌 것을 작품으로 보이게 만드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6. 놓쳐서 아쉬웠던 전시

 

<고스트 샷건>(시청각)

<ORGD 2019 심우윤 개인전 모란과 게>(원앤제이갤러리) 

<보안이 강화되었습니다>(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씨>

<미디어펑크 : 믿음 소망 사랑>(아르코미술관) 

 

 

7. 2019년의 OOO

 

2019년의 전시 디스플레이

<리브 포에버>(하이트컬렉션) / 잭슨홍<필살기>(취미가) / 텍스처 온 텍스처 <변화구성>(코사이어티)

👉세 전시 모두 '전시 감상'의 차원에서 아주 즐거운 관람을 했는데, 정작 맘에 들게 찍힌 사진이 없어 사진은 올리지 않는다..

 

2019년의 작품배치

<PRO-TEST>(SeMA벙커)에서 호상근의 작품들 

👉 SeMA 벙커에 상설 전시된 여의도 및 벙커 관련 기록사진 사이에 호상근의 그림들이 슬며시 끼어들어간 형태였는데, 내용 면에서도 끝말잇기하듯 이어지는 부분이 있어 재미있었다.

 

2019년의 전시제목

<사실 시체가 냄새를 풍기는 것은 장점이다>(아트스페이스 풀)

👉 가장 인상깊은 전시제목으로 꼽았으나 정작 전시를 보진 못했다..

 

2019년의 셀카존

이상혁, 최다함 <리플렉션 스터디>(원앤제이플러스원) / 엘름그린 & 드라그셋<Adaptations>(국제갤러리)

👉 공교롭게도 같은 날이었다.

 

2019년의 공놀이

양혜규<서기 2000년이 오면>(국제갤러리) / 안은미<안은미래>(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 

👉 양혜규 전시에서는 안은미 전시에서만큼 적극적으로 공놀이를 할 수 없긴 했지만..

 

2019년의 폐허

시대여관

👉 조명도 없는 전시장은 정말 오랜만이었고..

2019년의 큰 책

<잡지쿨 5호 팝업>(wrm)

👉 막상 사진으로 보니 큰 느낌이 잘 살지 않는데, 단지 크기만 키운 것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