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벽지: 페인팅과 오브제 사이, 혹은 오브제 위에서, 이미정 <The Gold Terrace>
'Multi-function storage box'(2018), (detail cut)
벽|벽지: 페인팅과 오브제 사이, 혹은 오브제 위에서
이미정 <The Gold Terrace>, 아트딜라이트, 2018.11.09-12.02
글 콘노 유키
누워 있으면서, 시트, 베개 커버, 담요 커버 등을 그야말로 하찮은 장식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이것이 의외의 실용품이라는 사실을 스무 살 정도나 되어서 알고는, 인간의 검소함에 눈앞이 캄캄해지며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작품을 보는데 그것이 ‘더 이상’ 페인팅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경우란 그 작품에서 완전히 페인팅의 성격이 배제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예컨대 건축물을 보고 페인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작품에 페인팅의 성격이 보이지만 적절하게 나오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이 페인팅에 실패 혹은 실격의 낙인이 찍혔을 경우, 다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페인팅 혹은 회화작업인 듯 했으나 다른 장르로 넘어간 단계이다. 예컨대 도널드 저드(Donald Judd)의 글 「Specific Object」(1965) 2나 브라이언 오도허티(Brian O'Doherty)의 『하얀 입방체 안에서』(1999) 3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주장했던 모더니즘 페인팅이 평면을 추구하다가 결국 거의 오브제에 가까워진 지점이 그렇다. 이 경우는 페인팅(자체)이 다른 매체(medium)로 병합된 결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페인팅이 평면이라는 보다 물질적인 조건에 압도되면서 오히려 외적 형식, 그러니까 지지체가 강조되어 버렸다. 다른 하나는 페인팅이 입체적인 물건의 부속품으로 여겨지는 경우이다. 말하자면 페인팅이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장식으로 ‘기능’하여 물건에 병합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때 페인팅은 어떤 대상/오브제를 장식하기 위한 수단인데 그 물건에 대한 쓰임새로서 나타나면서 더 이상 페인팅 자체로 보이지 않게 된다.
두 실격사유의 공통점은 더 이상 페인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대상 혹은 오브제에 병합되는 점이다. 물감을 칠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대상 자체 혹은 오브제를 위한/오브제에 대한 장식으로 기능할 때, 그것들은 ‘더 이상’ 페인팅으로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이미정의 이번 개인전 <The Gold Terrace>은 물감을 칠해 만든 ‘입체’작업을 선보이면서도 페인팅과 그려지는 지지체인 매체 사이에 생기는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좁은 주거 환경에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구들을 차용해서 입체작업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페인팅은 가구의 장식물이라기보다 가구를 만들 때 쓰는 재료-재질 자체를 재현한다. 예컨대 'Multi-function storage box'(2018)를 보면 표면에 페인팅을 한 흔적이 보이지만 뒷면에 보면 아무것도 칠하지 않았기 때문에 투명 판유리의 재현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재현방식은 뒷면에 칠을 안 했기 때문에 말 그대로 평면(적)인 재현에 그치는 반면, 'The pillar of my house'(2018)의 경우 페인팅은 오브제에 쓰인 재질 자체를 재현한다. 말하자면 뒷면까지 물감이 칠해지면서 여기서 대리석 마블링은 장식이 아니라 그 오브제의 일부인 잘라낸 대리석 자체로 인식하게 해준다.
'The pillar of my house'(2018)
따라서 'Multi-function storage box'이나 대리석 ‘표면’을 재현한 'Matryoshka-table'(2018), 그리고 나무판 반쪽을 재현한 'Unfriendly shelves'(2018)처럼 표면 한쪽에만 그렸을 때 뿐만 아니라 'The pillar of my house'의 경우 역시나 여전히 페인팅이라 부를 수 있다. 이때 앞서 본 페인팅의 두 가지 실격사유는 회피되고 있다. 전시장에서 페인팅은 오브제를 위한/오브제에 대한 장식도 아니고 또 오브제 자체에 통합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그 관계는 더 복잡해진다. 요컨대 페인팅을 통해서 오브제 자체를 재현해주는 장식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여전히 페인팅으로 볼 수 있는 점, 더 정확하게는 페인팅으로 봐야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가구나 인테리어와 같은 소품에 그려지면서 오브제 자체로 인식되는 경우와 달리 여기서 페인팅은 실제 물건의 재질을 표면적으로 속이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는 작가가 초기에 딜도 모양을 도예작업으로 만든 'Pink lens effect'(2009)부터 시작해서 작년 인스턴트 루프 전시 <몸몸몸>에 포함된 작업 'Useful face'(2015)이나 'Useful torso'(2018)와 같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쓰임새’와 ‘기능’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업에서 그때까지 부각되지 않던 지점, 말하자면 ‘페인팅의 기능성’을 다루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시 처음에 제기된 질문으로 돌아오자. 이번 전시에서 페인팅은 더 이상 페인팅이 아닐까? 아니면 여전히 페인팅일까? 이 질문은 주어를 바꿀 필요가 있다. 요컨대 이번 전시에서 작업을 볼 때, 오브제로만 볼 수 있을까? 분명 거기에 있는 작업들은 가구나 인테리어의 형태이기 때문에 오브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번 전시에서 페인팅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물감으로 칠했다는 사실관계에서 더 나아가, 페인팅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페인팅과 오브제 사이에서 동요하던 실격사유는 이제 페인팅에 의한 환영과 재현으로 넘어가면서 오브제를 압도하게 되었다. 나뭇결을 흉내낸 선반이나 대리석을 흉내낸 테이블은 어떤 장식 혹은 지지체라는 매체로 통합되지도 않고, 오히려 표면적인 재현을 통해 재질이라는 실제 자체를 속인다. 그러한 재현방식은 'Multi-function storage box'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작업에서 투명 판유리는 밑에서 빛이 통과되지 않는다. 재현에 의한 환영은, 칠을 안 해 놓은 뒷면을 통해 그것이 재현되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페인팅의 역할 또한 보여주고 있다. 페인팅은 이때 부속적인 장식이 아닌, 재현하기를 통해 매체를 시각적으로 모방해서 대리석이나 투명 판유리를 만든다.
여기서 다시 다자이 오사무(Dazai Osamu)의 소설 <인간실격>에서 화자가 베개 커버를 보고 느꼈던 바를 거쳐, 다음과 같이 풀 수 있다. 요컨대 이번 전시에서 페인팅은 오브제 자체를 재현하는 매체로서 ‘의외의 실용품’이었다. 전시공간에서 페인팅은 오브제의 종속되지 않고 재현의 힘을 발휘하여 오브제를 만들고 있다. 이처럼 오브제와 페인팅의 사이에서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게 된 사실, 그 관점에서 보면 이번 전시는 가구나 인테리어, 혹은 그것들이 나열된 쇼룸보다는 벽에 벽지를 바르는 과정에 더 가깝다. 우리가 벽지를 보고 벽으로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것처럼, 출품된 작품을 가구나 인테리어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핵심은 아무것도 칠을 안 한 뒷면을 통해 물감이 다른 재질을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작가의 작업이 ‘오브제와 페인팅이 결합된 것’ 혹은 ‘인테리어와 가구들’로 판단하기 전에, 다시금 페인팅과 오브제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작품을 둘러싼 페인팅과 오브제 ‘사이의’ 개념적인 관계에서 출발하면서도, 지지체/오브제 ‘위의’ 물감이라는 더욱 세부적인 관점에 서서 ‘페인팅이 어떻게 다뤄졌느냐’에 주목해야 한다.
*본 글은 https://emjelee.com/TEXT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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