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전시-되기, <종이와 콘크리트>

건축전시-되기

<종이와 콘크리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7.9.1-2018.2.18

글_ 곽현지



1.

2017년 하반기 서울에 건축과 관련된 전시 및 행사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서울건축문화제>, <서울세계건축대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자율진화도시>, <오픈하우스 서울>이 그 흐름을 잘 보여주는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종이와 콘크리트> 또한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 중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는 <자율진화도시>와 <종이와 콘크리트>인데 자율진화도시는 서울세계건축대회 조직위원회와 공동으로 기획되었고 서울세계건축대회 기념전의 성격을 띠고 있어, 미술관에서 단독 주관 및 기획된 전시로는 <종이와 콘크리트>가 유일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미술관에서 건축 혹은 건축적인 것을 마주해왔다. 몇 년 전부터 해마다 여름이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관람객들의 쉼터가 되었던 젊은 건축가들의 파빌리온이 있었고, 미술관의 유휴공간을 활용한 건축 작품도 보았고,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과 프로젝트를 연대기 순으로 학습할 기회도 있었다. 미술관에서 건축가 아카이브를 구축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한편으로는 스타건축가와 만나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멋진 외관의 미술관을 보고 있노라면 ‘가보고 싶네’와 동시에 ‘와 자본주의 스펙타클이네’ 따위의 양가적 감정이 들었다.





2.

우리는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기둥밖에 남아있지 않은 그리스 신전이나, 뾰족한 첨탑을 가진 성당이나, 총체예술의 이름으로 소환된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교회와 같은 미술과 건축의 교집합을 구구절절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술과 건축이 완전히 멀지 않은 사이임을 관념적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건축 전시는 어쩐지 낯설다. 1960년대 이후 미술가들이 끊임없이 탈장르, 탈매체를 외쳐왔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에서 전시의 형태로 (재)조직되는 건축에 대한 담론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났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013),  <매스스터디스 건축하기 전/후>(플라토미술관, 2014), <아키토피아의 실험>(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015),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귀국전 <한반도 오감도>(아르코미술관, 2015)와 <용적률 게임>(아르코미술관, 2017) 등의 전시를 떠올려볼 때 2010년대에는 건축에 대한 지식 생산과 소비가 건축의 경계 바깥을 넘는 현상이 빈번해짐을 알 수 있다. 이 쯤, 미술관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건축’이라는 테마 속에서 <종이와 콘크리트>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3.

<종이와 콘크리트>는 건축 전시지만 으레 있을 법한 건물 모형이나 드로잉, 건축물의 내부 공간 설치와 같은 물리적 형태의 재현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역사에 굵직한 획을 그었던 사건을 담은 영상, 그리고 전시실 양쪽 벽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연표를 통해 1987-97년의 시대상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종이와 콘크리트’라는 전시 타이틀처럼, 전시의 주인공은 콘크리트가 아닌 종이다. 이 시기에 수많은 종이들을 양산해낸 건축가들은 고립된 순수예술이나 조국 근대화를 건설하는 수단이 아닌 사회 속의 건축에 눈을 뜬다. 청년건축인협의회, 수도권지역건축학도협의회로 시작되는 소그룹 건축 운동은, 4.3그룹, 서울건축학교 등의 단체로 바톤을 이어받는다. 이들은 학연 중심의 집단에서 탈피하여 건축가가 아닌 건축인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하며 건축의 의미를 되물었다. 국가주도의 거대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새로운 건축미학에 집중한 앞선 세대의 건축가와는 달리 이들 집단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 자유로웠다. “막스 베버(Max Weber)의 이름이 마르크스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의 책이 공항 검색대에서 압수당했던 시절”에 이 단체들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책을 찾아 읽고 러시아 혁명사를 논했다는 것은 당시 건축가들이 다른 지점에서의 아방가르드였음을 반증한다. 그들은 서구 모더니즘의 학습, 세계화 속의 한국성 발견, 미술 및 영화 등 타 학문과의 교류 등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망으로 스스로 학습했다. 비록 이들이 각자의 정체성이 부족하고, 실효성 있는 제도와 파급력있는 정책을 이끌어내지 못한 미완의 건축 운동이었을지라도, 전시는 한국 현대건축의 지형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1987-97년 건축 운동의 궤적을 의미있게 판단한다.


4.

건축은 그 특성상 있는 그대로를 전시장으로 데려올 수 없기에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낼 여러 가지 방법론을 제시하는데, 건축 아카이브 또한 그 중 하나이다. 특정 대상을 지시하거나 보충하는 미술 아카이브와 달리 건축 아카이브는 작품의 지위를 가지고 미술관에 침투하는 것이다. <종이와 콘크리트>의 종이들은 전시의 오브제가 되었으며, 이것들은 관람자가 직접 만지며 읽을 수 있도록 기술적 복제를 통해 이중으로 전시되었다.

아카이브 전시는 시각적 감흥이 주는 긴장감을 놓치기 쉬운데, <종이와 콘크리트>는 그 대안으로 ‘콘텐츠 역할극’을 제안한다. 종이를 담고 있는 가구에 바퀴를 달아 위치를 옮길 수 있게 한 점이나, 1987-97년 당시 지식 공유의 수단이었던 복사기를 통해 관람객이 자료를 복사할 수 있게 하는 등 전시가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 대홍수의 시대에 종이가 주는 엄숙함에도 불구하고, 아크릴 박스에 박제된 종이, 꺼내볼 수 있는 종이, 액자화된 종이, 복사 가능한 종이, 종이를 복제한 종이, 종이를 쌓아 촬영한 종이들은 텍스트로서 기능하는 종이가 매체와 내용으로서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5.

건축을 전시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에 선행되는 질문인, 건축이란 무엇일까? 이것은 '미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만큼이나 답하기 어렵다. 건축을 어떻게 생산하고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건축이 미술관 전시에 적합하기는 한 것일까? <종이와 콘크리트>가 조명하는 건축 운동과 그것이 전시되는 방식을 보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무엇인가를 짓는 행위로서의 과정, 그리고 그것의 가시적 결과 모두가 건축이라는 개념에 포함될 수 있다면 전시는 가능해질 것이다. 이미 모든 땅이 욕망으로 각인되어 있는 저성장 시대에, 건축은 건물을 올리고 그 물리적 경계를 구획하는 것에서 도시 및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요인이자 공공적 이슈에 개입하는 주체로 그 역할이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응하여 사회적 실천 및 문화 콘텐츠로서 건축의 범주 또한 확장하게 된다. 따라서 건축이 미술관과 맞닿으며 전시 가능한 이슈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종이와 콘크리트>는 콘크리트의 영역에서 탈피하여 종이를 지향했던 시기를 조명한다. 이 시기의 건축가들은 건축이 글과 말로서 발화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종이와 콘크리트>가 덜 대중적이며 생소한 테마인 동시에, 아카이브라는 방식으로 전달할 수 밖에 없는 1987-97년의 건축 운동에 주목한 이유일 것이다. 이것은 단지 유명한 건축물을 재현하거나, 건축가의 일생에 따라 연대기적 흐름으로 건물을 배치하거나, 건축디자인의 미학적 감수성을 살펴보는 전시가 아니라 ‘지금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건축 운동의 비평적 맥락을 인지시킨다. <종이와 콘크리트>는 건물이 아닌 담론으로서 건축의 가능성과 건축 전시의 가능성 두 가지 모두를 병치시킴으로써 미술관에 안착한 건축 전시 스스로의 당위성을 내보인다.



사진 : 백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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