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은하가 만나는 순간, 양아치 <When Two Galaxies Merge,>

    <갤럭시, 사랑, 8Hz> , Mixed media, 2017



두 개의 은하가 만나는 순간,
양아치 <When Two Galaxies Merge,> 아뜰리에 에르메스, 2017.9.8 - 11.22


글 장예지


본격적인 전시리뷰에 앞서 글쓴이가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전시 도슨트로 근무하고 있음을 밝힌다. 글쓴이는 도슨트로서 작가의 작업에 대해 설명하며, 대부분 전시를 관람하는 이들을 관람하며 근무 시간을 보낸다. 다수의 관람객들은 동선 하나 주어지지 않고 캡션도 없는 불친절한 전시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누군가는 당장 도슨트 앞으로 와서 설명을 부탁하고 다른 누군가는 인상을 찌푸린 채 카탈로그의 텍스트를 읽기 바쁘다.


많은 이들이 양아치라는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미디어 아트를 떠올릴 것이다. ‘Media’의 사전적 의미는 매체이며, 양아치에게 있어 매체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이다. 결국 양아치 작가의 ‘전기-전자가 배제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미디어’에 대한 실험과 구축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잇는 '휴먼 네트워크'에 대한 탐구와 궤를 같이한다. 양아치의 이전의 전시들 <뼈와 살이 타는 밤>(학고재 갤러리, 2014)나 <바다 소금 극장>(Slow Slow Quick Quick, 2015) 또한 그러한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작가는 전시 공간을 하나의 전미래[각주:1]가 가득한 무대이며 그것은 대륙이동설클럽, 5G, 불면증, 서울, 최면, 사랑을 위한 무대가 될 것이라고 전시 카탈로그에 설명한 바 있다. 작가가 제시한 키워드 대부분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키워드들은 작품명을 대체하나 작품 개별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으로는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빈 단어처럼 느껴진다. 각각의 작품(오브제)들을 도상적인 맥락으로 읽는 것도 어렵다.

먼저 무질서하고 다양한 사운드를 감지하며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반짝거리는 오브제와 악기들을 발견하게 된다. 일차적으로, 관람객들은 여기저기 산재한 오브제들 사이에서 동물의 박제를 발견하고 놀라워한다. 이어서 관람객들에게 가장 놀라움을 주는 것은 새장 안에서 푸드득거리는 새의 존재다. 살아있는 새는 전시 공간에 인간의 청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사운드가 흐르고 있음을 시각화 하는 매개로써 존재한다. 전시장을 메우는 다양한 ‘소리’ 장치는 관람객의 발목을 잡는다. 누군가는 ‘갤럭시, 대륙이동설클럽’에서 흘러나오는 광둥어를 듣고 어린시절 보았던 홍콩영화에 대한 향수 어린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이처럼 전시의 청각적 요소는 관람객에게 다양한 기억과 감각을 촉발시킨다. 작가는 이렇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발적인 생각들이 개개인에게는 하나의 스크린이자 미디어로 기능 한다고 보았다. 개별적 스크린은 결국 ‘전기-전자가 배제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미디어’의 구현이다. 다양한 오브제들은 우리가 맹신하는 것들, 예를 들자면 시각적인 것이나 어린시절부터 교육받은 것들로 구축된 개인의 견고한 세상에 변주를 가한다. 작가는 '휴먼 네트워크'를 구축 가능케 하는 것은 '촉각적 접촉'이라고 보았다. 청각은 음파가 고막과 접촉하면서 소리가 발생한다는 지점에서 전시 내에서는 촉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오브제들을 커다란 군집으로 본다면, 그 전체는 양아치의 프로그래밍에 의한 ‘스코어Score’인 동시에 작가가 구축한 조형 언어의 파편인 셈이다. ‘갤럭시, 스코어’라는 작업은 몇 개의 작은 오브제를 불규칙하게 바닥에 늘어놓은 것과 노란 천 위에 자수를 놓은 것으로 작가가 제작한 '악보’이다. 전시장에 놓인 키보드나 ‘갤럭시, C-A-G-D-E[각주:2]’라는 작품명을 본다면 이를 유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전시 카탈로그에는 새의 존재를 ‘변수’라고 상정했으나 그 ‘변수’ 조차 작가의 프로그래밍 하에 놓여 있다. 양아치가 ‘악보’라는 이름으로 표기한 것들은 작가에 의한 새로운 ‘기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양아치의 작업은 현대미술의 정석 또는 교과서 쯤으로 여겨지는 몇몇 작가들의 작업과 닮은 꼴로 보인다.

다시 전시 카탈로그의 서문으로 돌아가보자. 양아치의 언급에 따르면 작가가 제안한 이 무대(전시 공간)는 관람객들의 개별적인 스크린, 즉 그들의 개별적인 예술이 탄생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양아치의 ‘기호’를 일부 이해하거나, 공유하지 못하는 듯 하다. 전체적인 ‘기호’를 독해하지 못하는 관람객들에게 그의 작업은 ‘난해한 현대미술’에 그친다. 글쓴이는 종종 양아치의 전시를 본 이후에 난해한 현대미술을 책망하는 관람객들과 마주한다.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독립된 공간이 아니므로, 목적 지향성 없이 전시 공간에 들어오는 이들도 많다.) 이들에게 직업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눈높이 설명을 거듭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양아치의 작업을 변호하거나 합리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모든 현대미술이 대중 친화적이거나 쉽게 읽혀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양아치 작가에게 미디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도구라면, 그의 작업적 지향점이 '휴먼 네트워크'의 구축이라면, 전시와 관람객 사이의 몰이해는 모순적인 일이 아닐까?





  1. '전미래'란 불어에 존재하는 시제로, 미래에 행해져야 할 일에 대하여 그 이전에 행해진 일을 말한다. [본문으로]
  2. 기타의 운지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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