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특집 02 - 여전히 저장되며 살아남은 캐릭터에 대하여, 스기모토 켄스케 <수십 년이나 전에 죽었다.>


여전히 저장되며 살아남은 캐릭터에 대하여
스기모토 켄스케, <수십 년이나 전에 죽었다.>, 중앙본선화랑, 2018. 1. 26 – 2. 3


글 김이현




(중앙본선화랑으로 향하는 풍경)



여행자는 수많은 장소를 다니며 수많은 사진을 찍는다. 셀카나 풍경, 음식 사진 등 다양한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시간이 아마 여행일 것이다. 여행에서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스마트폰 사진 촬영은 어떠한가? 우리는 스마트폰의 카메라 앱에서 셔터를 누르기 전에, 초점을 맞추고 싶은 부분을 터치해서 조정한다. 알맞게 초점이 맞춰졌을 때야 비로소 셔터를 터치하고 사진을 찍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여행에서 아주 일상적인 일이다. 이렇게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닌 도쿄에서 방문한 중앙본선화랑(Chuohonsengarou, 中央本線画廊)은 초점이 맞거나, 초점을 잃은 전경으로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본선화랑의 위치는 구글 지도에 등록되어 있지 않아서 홈페이지의 주소를 직접 찾아야만 했다. 번화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동선상으로도 애매한 위치였으나 웹사이트로 봤던 흥미로운 작품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도쿄에 온 김에 가보자'라는 일념으로 그곳에 방문했다. 니시오기쿠보역에서 전시장까지의 길은 행인 두어 명이 전부인 한적한 풍경이었고, 중앙본선화랑에 도착했을 때는 창문이 막혀 있어서 전시가 진행 중인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구글 지도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화랑이나, 미술 전시가 열릴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려운 조용한 동네, 전시 기간을 연장한다는 트윗, 입구가 막혀있는 작은 전시장의 외관 등이 외국인 관람객인 필자를 불안하게 했다. 전시장에 들어가 보니 채 10평도 안되는 공간에서 전시가 진행중이었고,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관람 중이었다.



2월 2일에 방문한 중앙본선화랑에서는 <수십 년이나 전에 죽었다(何十年も前に死んだ。)>라는 제목으로 스기모토 켄스케(Kensuke Sugimoto, 杉本憲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중앙본선화랑에서는 이 전시 제목이 죽은 자와 캐릭터에 대한 작가의 관점과 공명한다고 소개했다. 이어 소개된 작가의 글에서 스기모토 켄스케는 컴퓨터 화면에서 몇 년 전과 똑같은 모습의 캐릭터를 언급한다. 작가는 이런 캐릭터의 존재가 스스로에게 노화, 풍화, 죽음으로부터 도피 혹은 위안처로 기능한다고 말하고, 여기서 조금 비약한 부분에 자신의 작업이 있다고 밝혔다. 수십 년이나 전에 죽었음에도 여전히 화면에서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처럼 작가는 단편화된 풍경, 사물, 신체가 본래의 양태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생명감을 보이는 것에서 새로운 생사에 대한 관점과 신체의 가능성을 느낀다고 말한다.


별다른 캡션 없이 전시된 스기모토 켄스케의 작품들은 캔버스, 철거된 건물의 파편 등 다양한 지지체를 사용했고, 모두 만화 캐릭터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본래 만화 캐릭터는 영상 혹은 칸 안에서 적당한 입체감을 표현하며 평면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작가의 작품에서 이런 캐릭터는 기존의 서사를 이끌던 화면에서 외연만 튀어나와, 그 선명함과 흐릿함의 초점을 조정하면서 그것의 물질화를 시도한다.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캐릭터의 단편들은 캔버스와 건물 파편에서 다시 가동되기를 시도하는데, 이런 캐릭터의 존재는 과연 작가가 밝힌 것처럼 인간의 죽음으로부터 도피 혹은 위안처로 기능할 수 있을까?



전시장에서 가장 큰 크기의 스기모토 켄스케의 회화에서 캐릭터는 선명한 눈과 흐릿한 색채의 신체로 나뉘어 등장한다. 그리고 정면의 관람자를 바라보는 그 눈은 선명하지만 쭈욱 늘어진 형태였다. 응시하는 눈만 선명하게 부유하는 이 회화는 한편으로는 디지털 환경에서 흔적을 남기며 재생된 오류 이미지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렁이는 유령눈과 같았다. 캐릭터의 신체에서 분리된 눈은 그 ‘생명력’을 연장하고자 선명하게 그려졌지만, 몇 프레임 정도의 이동 흔적을 남기며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전시장에 놓인 또 다른 회화에서는 눈이 아닌 검정 윤곽선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만화에서 윤곽선은 색채의 유무와 상관없이 형태를 결정짓는다. 그런데 스기모토 켄스케의 회화에서 윤곽선은 캐릭터의 형태를 결정짓기보다 혼란스럽게 만든다. 초점 잃은 색채, 선명한 색채, 검정 윤곽선으로 나뉘어버린 하나의 캐릭터는 모두 캔버스에 그려졌지만 불안정한 신체를 유지할 뿐이다.


스기모토 켄스케는 평면 작품에서 캐릭터의 신체를 분리하고 변형시켰다면, 입체 작품에서는 캐릭터의 물질적 신체를 획득하도록 시도한다. 서너 개의 작은 캔버스에서 물감은 질척하고 두꺼운 질감으로 넘쳐 흐르고, 물감의 색과 윤곽선은 그 물감 덩어리들을 피부처럼 그려내고 있다. 또한, 옆 테이블에는 철거된 건물의 파편들과 파손된 조각상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두껍거나 얇게 칠해진 물감의 색으로 인해 조각난 신체처럼 보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캐릭터의 신체는 평면 작품에서는 희미했던 부피감과 무게감을 꽤 선명하게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 입체 작품들은 선명하게 일정 공간, 무게, 부피를 차지하지만 파편된 신체가 되어 캐릭터의 형상이길 포기했다. 즉, 캐릭터는 입체적인 작품이 되어 선명한 실재가 되려고 하지만, 다시 불투명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를 움직이게 만드는 요소들은 다양하다. 윤곽선, 색, 입체감, 원근감 그리고 시간과 운동성 등. 그런데 작가는 이런 많은 요소들이 함께 조화롭게 적용되길 멈추게 하고, 오직 몇 가지 요소만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화면에서 움직이던 캐릭터는 중앙본선화랑에서 정지된 물질로 표현되는데, 그것의 단편화된 신체들은 오히려 불안정하고 불투명하다. 다른 요소들과 연동하지 않고 일부분만 선명해진 작가의 작품은 비록 캐릭터에서는 멀어졌으나 계속해서 출현한다. 즉, 움직이던 캐릭터는 스기모토 켄스케의 작품에서 자신을 구성하던 요소를 독립적으로 드러내면서 새로운 형태와 존재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수십 년이나 전에 죽었을지라도 여전히 관람자 앞에 등장하고 또 필자같은 여행자의 스마트폰에 저장되고 있다.


한편, 트위터에서는 초점이 나간 사진과 함께 이 전시의 카탈로그가 4월 28일부터 발간되어 판매를 시작한다고 알리고 있다. 이 전시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책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제공 : 중앙본선화랑 트위터)






👉 여행 팁 :

한적한 이 동네에서 간단하게 커피와 빵을 먹을 수 있는 카페 ‘どんぐり舎’를 추천한다. 구글 지도에서 (5점 만점 중) 4.3점의 평점을 받은 이 카페는 아름다운 외관이 돋보이고 실내 흡연이 가능하다. 만약 중앙본선화랑을 방문한다면 한가롭게 이 카페에도 들러서 피자 토스트 등 맛있는 빵과 진한 커피를 마시면서 쉬어가는 것이 도쿄 미술 여행을 갈무리하는 팁일 것이다. (주소 : 3 Chome-30-30-1 Nishiogikita, Suginami-ku, Tōkyō-to 167-0042 일본)

(카페 ‘どんぐり舎’의 외관과 피자 토스트)


👉 중앙본선화랑 (Chuohonsengarou, 中央本線画廊) :

현대 미술과 디자인 및 공예 기획전을 주로 전시하는 중앙본선화랑은 홈페이지를 통해 3가지의 전시 기획 방향을 공유한다. 첫 번째, 이 술집 병설 화랑은 '화랑 술집 기획(현대 미술)'을 통해서 실험적인 전시 공간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이 장소가 미술을 사랑하거나 지향하는 젊은이들이 모이는 교류의 장임을 밝힌다. 또한, 이 화랑은 도쿄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품을 전시한다고 말하면서 “전시를 보면서 마시는 스타일”을 통해 미술가는 물론, 컬렉터, 미대생까지 밤마다 편하게 술을 마시며 새로운 미술 장면을 만들길 지향한다. 두 번째로 ‘Life Stuff 기획(디자인 및 공예)’은 작가의 삶과 사상을 깊이 파고드는 전시 기획을 의미한다. 화랑은 지금까지 작품을 제작해 온 작가가 자신의 가치관을 제시하는 자리를 목표로 기획하고, 작가의 생활 주변의 것들을 통해 삶과 사상과 마주한 결과를 전시 공간에서 표현하고자 한다. 세 번째 기획은 기획이 비어있는 시간에 화랑 대여를 하는 ‘임대 화랑 기획’이다. 홈페이지에는 옛날 담배 가게였던 곳을 개조한 이 화랑이 전시, 워크숍, 카페 등으로 사용 가능하며, 표현을 하고 싶지만 장소가 없는 사람, 무엇인가 기획하고 싶지만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1일에 18,000엔의 비용으로 공간 임대를 진행하라고 적혀 있다.

- 주소 : 4 Chome-6-6 Kamiogi, Suginami-ku, Tōkyō-to 167-0043 일본

- 웹사이트 : http://chuohonsengarou.tvvt.tv

- 트위터 : @chuohonsen

👉 스기모토 켄스케 (Kensuke Sugimoto, 杉本憲相) :

1991년 출생

2014년 카나자와 미술 공예 대학 미술 공예 학구 미술과 일본화 전공 졸업

2016년 도쿄 예술 대학 대학원 미술 연구과 첨단 예술 표현 전공 석사 과정 수료

- 웹사이트 : http://knsksgmt.wixsite.com/kensukesugimoto

- 트위터 : @Kensuke_Blue


👉 이미지 제공 : 김이현



TAG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