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소거하면 남는 것들, <서브토피아>




서울을 소거하면 남는 것들

<서브토피아>, 광교 따복하우스 홍보관, 2017.10.20-2017.11.03

글 곽현지



 경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Those except public, art and public art : 2017 공공하는예술 아카이브 전시> (이하 <공공하는예술>) 은 매년 경기도 지역을 순회하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2016년 양평 두물머리 일대에 이어서 2017년에는 용인시 일대를 대상으로 했다. <공공하는예술>은 광교의 따복하우스 홍보관을 기점으로 전시 <서브토피아>, 퍼포먼스 <아무 것도 바꾸지 마라>, 워크숍 <신갈> 등 6개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글은 다른 프로젝트와 달리 고정된 시공간에서 온전히 관람할 수 있었던 <서브토피아>에 집중하기로 한다.


공공미술이 다양한 용법으로 공과 관의 요청을 받고 있는 시점에서 <서브토피아>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광활한 범주의 풍경들을 어떻게 '공공'으로 포획할 수 있을까? 많은 공공미술은 도시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의미와 장소성이 빈번히 탈각되어 왔기에, <서브토피아>는 그것이 배경으로 하는 '도시'를 전면에 내세운다. 기획자와 7명의 참여 작가들은 용인에서 자란 사람일 수도, 용인을 파편화된 이미지로 경험한 사람일 수도 있다. 개인적인 기억이든 외부자의 시선이든 간에 이들은 도시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재발견하는 등 넓은 범주의 리서치를 수행한다. 그간 한국의 공공미술이 휩싸였던 강박인 새로운 (동시에 괴이한 결과를 창출해내는) 조형물을 세우는 것에서 벗어나 장소에 깃든 미시적인 존재의 서사와 경험을 이끌어내거나 관찰자로서 도시를 객관화할 수 있는 지표를 내세운다.




장석준, 나대지 모음_Flat2017, 2017, 디지털 컬러 비디오, 30분 내외


줄리앙 코와네, 인터코스 맵 용인, 2017, 디지털프린트, 가변크기 



 따복하우스 홍보관의 외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석준의 비디오작업 '나대지 모음'의 스틸이미지는 전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거쳐야만 한다. 건물이 없는 대지를 의미하는 '나대지'는 주변의 차, 아파트, 도로, 주차장 등에 의하여 빽빽하게 둘러쌓여 있다. 작품 속에서 도시의 일부분인 나대지는 또 다른 무엇인가로 공간을 채우기 위한 유예된 공간일지 모른다. 전시장 내부에 설치된 원 작품인 '나대지 모음'은 도시 곳곳의 틈을 서서히 클로즈업함으로써 욕망이 스며드는 곳들을 관망하게 만든다. 

 이처럼 <서브토피아>에서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이미지는 지도와 위성사진이다. 이것들은 가시성의 영역을 벗어난 새로운 공간이 있음을 주지한다. 도시의 많은 부분은 사람의 시선 너머 계획되어 왔으며 지도와 위성사진은 서울이 그것의 중심성을 확장하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어 왔다.


 '나대지 모음'이 용인의 비어있는 곳을 조망한다면, 줄리앙 코와네(Julien Coignet)의 '인터코스 맵 용인'은 용인에 있는 골프장에 주목한다. 서울이 스스로를 거점으로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여가시간에 즐길만한 것들을 주변부로 밀어낸다고 할 때, 용인의 골프장은 서울의 하부시설로서 경기도에 위탁해놓은 서비스 공간으로 기능한다. 지역과 무관하게 접근성에 따라 배치되는 골프장은 소수의 인원만 출입할 수 있는 통제된 공간이다. 우리는 위성사진을 통해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체험하기는 어렵다. 코와네는 골프장과 골프장 아닌 도시 공간이 어떠한 상호작용도 없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골프장과 용인의 주택가를 잇는다. 그는 용인의 평범한 어느 한 공간에 골프장의 골프공을 떨어뜨리는 허구의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용인은 전국에서 골프장이 많이 있는 도시이다'는 명제를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넘어 현실의 감각으로 와닿게 만든다. 



안성석, 단란한 가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2017, 리소프린트-만화지, 가변크기 (전시 전경)


전시장인 따복하우스 홍보관에는 일곱 작가들의 작품이 구석구석 산재해있는데, 전시장 한 켠에 놓여있는 안성석의 '단란한 가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의 과일은 관람객이 아무리 걷어내도 썩지 않는, 새 것의 상태로 남아있다. 그는 과일을 통해 청결과 위생을 신도시와 연관시킨다. 신도시는 편리함과 쾌적함을 위하여 자연스러움을 벗겨내고, 가장 인위적인 것을 덧대 사용자/거주자에게 최적의 위생을 제공한다. 안성석은 색 없는 도시의 경관에 반발하며, 대도시의 거주자들이 이루고자 하는 단란한 가정을 온갖 과일의 풍요로운 이미지를 배경으로 다시 묻는다.



 <서브토피아>는 용인이라는 구체적인 지역을 발단으로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울이 만들어지기 위해 밀려났던 혹은 그것을 지탱하는 서울의 주변부를 그림으로써 서울과 경기도를 둘러싼 지정학을 미묘하게 암시한다. 198-90년대 이래로 용인을 포함한 경기도의 많은 도시는 서울을 지향하며 스스로를 불려왔다. 중심까지 감당해야 하는 거리가 점점 멀어짐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서울의 일원이라고 믿게 만드는 곳이다. 이런 맥락에서, 따복하우스의 매커니즘은 교외도시의 공공이 수렴되는 방식과 연관된다.

 전시를 보기 위해 여정을 떠나다 보면 혹은 용인을 둘러싼일치될 수 없는 수많은 공공을 쫓다보면 따복하우스에 이르게 된다당연하게도 광교는 일반적으로 전시장이 밀집해있는 곳이자 서울의 중심인 종로나 강남 같은 곳은 아니다. 이 곳은 서울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1시간 이상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버스와 지하철이 1분 거리에 있는교통이 편리한 곳이기도 하다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를 위한 경기도형 임대주택인 따복하우스는 중심으로 이끌려오지만 미처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경기도에서 안착해버린 사람들의 쾌적한 삶을 위한 보금자리다이 쾌적함이 청년주거, 결저출산 극복 등 미시적인 삶의 궤적과 맞닿음(혹은 간섭함)을 떠올려볼 때 따복하우스에는 서브토피아를 위한 개인의 타임라인이 포함되어 있다서울이 소거되고 남아버린 터에 도달한 사람들그리고 여기에 틈입해서 서브토피아를 말하는 작가들은 오묘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전시의 제목 '서브토피아'는 중심같은 풍경이 주변에 이식되는 것일수도, 인위적인 것을 조성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주변(suburban)은 메트로폴리스를 단서로 하여 유토피아를 쫓지만, 스스로를 주변으로 만드는 중심성으로 인하여 이내 서브토피아가 되어버린다. 전시장 주변에 말끔하게 서 있는 아파트라는 현재, 그리고 아직은 비어있는 모델하우스가 안내하고 있는 공간은 존재하지도 않는 땅을 사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정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서울의 주변을 촘촘하게 둘러싸는 하나의 풍경이자, 유토피아를 위한 삶의 조건이 되고 있다. 






사진 : 경기문화포털(두 번째), 도두바(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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