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에 맺히는 이미지, 박광수 <부스러진>
시야에 맺히는 이미지
박광수, <부스러진>, 두산갤러리, 2017.10.18 - 11.18
글 장예지
박광수 작가의 작업 앞에 서서 커다란 화면을 쪼개서 보았다. 다양한 두께의 검은 선과 그 틈새들이 메운 여느 사람의 신장보다 커다란 화면, 그리고 모호한 이미지. 그 중 가장 먼저 선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리는 미술 내에서 조형적 언어로 기능하는 다양한 선을 보아왔고 더불어 작가나 비평가들이 ‘선’에 대해 골몰하여 파생시킨 거대한(그렇게 보일 뿐이거나) 담론도 숱하게 접했다. 박광수 작가가 그려낸 이미지 안에 쌓인 ‘선’은 어떨까. 처음 작품을 앞에 섰을 때는 이렇게 큰 화면에 선을 그어낼 수 있는 알맞은 도구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작가는 자체적으로 제작한 도구로 선을 그어낸다. 선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선을 그리고 있을 작가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제작된 펜은 경미한 신체의 흔들림이나 깊은 호흡, 멈칫하는 사고의 순간까지 포착하여 캔버스에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선들은 작가의 움직임과 시간을 겹겹이 쌓은 축적물이며 다양한 두께의 선들은 마치 시간의 흔적이 묻은 ‘더께’ 처럼 보인다.
커다란 평면작업 앞에 설 때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시선의 거리를 만들게 된다. 물러나는 시선으로 화면을 바라보면 가까이 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윤곽을 보인다. 선의 부스러기는 하나의 뭉치를 만들기도 시야를 와해시키기도 한다. ‘시선의 이동’은 작가의 애니메이션 작업에서도 나타난다. 평면작업이 스스로 시선의 거리를 두게 하는 것과 달리, 애니메이션 작업은 화면 내에서 시선을 잡아 이동하게 한다. 전자에 비해 자율성이 배제된 시선은 화면에 끌려 다양한 이미지들과 조우하게 된다.
그렇다면 <부스러진>이라는 전시 제목은 부스러지는 이미지 자체를 의미하거나, 작가가 이전부터 집중해왔던 ‘사라지는’ 이미지와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 속 대부분의 이미지는 사라짐을 예고하며 홀연히 떠나버릴 것 같은 인물이다. 작가는 이전부터 작품 안의 한 존재가 그림 안에서 사라지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이는 삶에서 직면할 수 있는 누군가의 소멸, 시간의 흐름에 따른 노화, 혹은 어떤 상실에 대한 은유이거나, 작가 본인에게는 드로잉에 대한 지표를 찾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박광수, <검은 숲 속>, 2017
이어서 이러한 이미지가 어디로부터 추출된 것인지 물음을 던져본다. 이 이미지들은 완전한 형태로 작가의 머릿속에 머물러 있던 것일까? 작가의 이전 인터뷰를 살펴보면 이러한 이미지는 작가의 구상에 따라 완전히 구현된 것이 아니라, 선의 이탈까지 수용하며 완결로 가는 과정 자체에 가깝다. 특정한 방향성을 갖지 않는 선들은 마치 하나하나가 분절된 언어처럼 보인다. 언어들의 뭉치는 확장되어 하나의 내러티브(이미지)를 만든다. 이는 선으로 넘겨지기 이전에 작가의 머릿속에 비스무리하게 존재했던 것이거나, 관람자의 시선이 맞닿는 곳에서 또렷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양자의 이미지는 비교적 유사한 것일 수도, 애초에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양자의 이미지 사이의 이격은 선의 틈새에서 발생한다. 이미지는 평면의 화면 안에 단단히 정지해 있지만,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처럼 그 다음으로 이어질 법한 장면들을 자꾸만 덧대어 보게 된다.
작업의 제목은 ‘부스러진’ 과 ‘검은 숲 속’ 이 두 가지 뿐인데, ‘부스러진’ 이라는 제목의 작업들은 마치 빛 바랜 초상화 같다. 화면 속 인물들은 상(image)만 남은 채로 부재를 암시하고 있지만, 화면에서 이탈하여 시각체계의 작동에서 벗어나면 이미지들의 심상(心像)이 뒤따라온다. 이제는 오히려 명료한 인물들을 보게 된다. 이미지의 이격들 사이에서 뒤 따라온 상(image)이 시야에 맺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 두산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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