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현실감각, 김희천 <홈>



순례자의 현실감각

김희천, <>, 두산갤러리, 2017.11.29 – 12.23


글 조은채 


40분가량의 영상 작업 홈(HOME)’(2017)에는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애니메이션 -()’가 삽입되어 있다. -()’의 주인공 에리카가 서울에서 실종된 할아버지를 추적하는 소녀 탐정이라면, ‘의 화자는 -의 극성 팬으로 현실에서 에리카의 여정을 직접 반복하는 일종의 성지순례자이다. 김희천이 에서 그리고 속의 애니메이션 -에서 사용한 실제 도시를 그대로 배경으로 쓰는 방식은 별도의 세계관 없이도 보는 이가 또는 -를 현실적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은 현실의 관객이 을 보기 위해 두산아트센터에 오는 경로까지도 충실하게 구현하면서, 관객이 스스로 자신을 영상의 일부라고 느끼게 유도한다. 흥미로운 것은 속 극성 팬 화자의 일견 열성적이지만 실은 무심한 태도이다. 일본인인 화자는 오로지 -때문에 서울행 티켓을 끊고 성지순례를 올 정도로 극성맞은 팬이지만, ‘-에서 에리카에게 닥친 고난이나 그녀의 감정 상태에는 이입하지는 않는다. 사실 화자는 에리카를 둘러싼 미스터리나 심지어 에리카의 죽음에 관해서도 태평할 정도로 무심하다. 화자는 자신이 심취한 에리카라는 캐릭터, 그리고 -속의 세계가 가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현실감각이 대단히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극성 팬, 오타쿠 혹은 순례자에서 도리어 가상과 현실 사이에 나름대로 명확한 경계를 긋는다. 반면, 영상 외부의 세계에 발을 딛고 존재한다고 믿어지던 관객은 현실과 가상 그리고 가상 속의 가상이라는 세 개의 레이어로 중첩된 속의 서울에 휘말려 든다.

 

-속의 성지순례를 중요한 축으로 삼아 진행된다. 성지순례라는 키워드는 대단히 명시적으로 주어지는데, 심지어 영상이 시작하기 전에 성지순례에 관한 의 정의가 문자로 주어지기까지 한다. 성지순례 이후에는 떠나기 전의 상태로 결코 돌아갈 수 없으며, 순례자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의미심장하다. 화자에 따르면, 순례자는 아니메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거나 아니메를 제 세상에 불러오고 싶다거나하는 이유로 성지순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아니메, -는 가상, “제 세상은 현실을 가리킬 수 있다.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그래서 가상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광적으로 좋아하는 순례자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부정된다. 현실감각의 사전적 정의는 외부의 세계와 자기의 구별이 분명하고 자기와 외부의 세계가 각각 의미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감각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이다. 그러나 픽션과 이미지의 범람 하에픽션이 개인의 일부[각주:1]가 되어버린 상황 속에서 자기외부의 세계의 구분은 과연 가능한가? 그저 사진에 초점을 맞추는 시간같은 애매한 위치에 머무르는 순례자가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제 외부/내부, 가상/현실, 진실/거짓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이미 그 경계는 무너진 지 오래고, 각각 서로의 부분집합으로 기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동시대적이면서도 새로운 현실감각은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형태가 어긋난 채로 구현된 광화문, 시청, 그리고 삼성동 의문의 집을 통해 가시화된다. 김희천이 선별한 장소들에는 어김없이태극기가 등장하는데, ‘은 이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벌였던 노인집단에 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에리카의 할아버지, 에리카, 에리카 시리즈의 극성 팬인 화자라는 삼중의 가상으로 우회한다. 할아버지가 남긴 위치 정보 데이터를 통해 에리카는 할아버지가 태극기 부대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지만,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들과 동행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에리카는 마음속으로 할아버지에게 도대체 여기서 무얼 보고 있었어?”라고 간절한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지만, 이 애니메이션의 극성 팬이라는 화자는 현실이라는 문맥을 끼워 넣어 에리카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볼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의 화자에게 자신의 과 에리카의 -는 완전히 다른 축 위에 존재해서 결코 싱크가 맞을 수 없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분간하지 못한다고 여겨지던 '순례자'는 이 현실감각에 가장 잘 적응한 인물이 된다. 하지만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믿었을 에리카, 탐정 혹은 관객은 실은 가장 "애매한 위치"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



김희천, '홈', 스틸컷


이 현실감각은 에서 그리고 -에서탄핵당한 전 대통령의 자택이라는 현실의 맥락을 지니고 있는의문의 삼성동 집이 다루어지는 방식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김희천은 태극기 부대의 자취를 좇으면서도 에돌아갔던 것처럼, 삼성동의 집과 그 주인에 관해서도 발언을 하는 대신에 우회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 우회는 삼성동의 집 자체가 인식되는 방식, 즉 현실은 허구의 일부로, 또 가상은 현실의 부분집합이 되어버린 현실감각을 시각화한다.의 마지막 장면은 삼성동 집의 내부를 둘러보는, 혹은 쫓기듯이 살펴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카메라 워크로 구성된다. 이 시선의 주인공은 높은 확률로 의 화자라고 유추할 수 있기는 하지만, ‘-속 에리카인지, 혹은 에리카의 할아버지인지, ‘의 화자인지, 그것도 아니면 을 보고 있는 관객을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화자는 -에서 에리카가 터널에서 갑자기 삼성동의 집으로 워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고 말하며, 혹여나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기대한다. 화자가 드물게 가상에서 벌어진 일이 현실로 소환되기를 내심 바랐음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영상의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에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터널에서 삼성동 집으로의 워프는 무엇과도 물리적으로충돌하지는 않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희천은 과거 썰매’(2016)에서 레이싱 게임 <그란 투리스모 4>의 ‘서울 숭례문 서킷’을 플레이하는 인물을 그려냈다.[각주:2] 이 게임은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는 별개인, 순수한 게임인 것처럼 플레이되다가광화문의 경찰차 벽이라는 실존했던 차 벽에 의해 돌연 가로막힌다.[각주:3] 그가 썰매에서 역사에 무관한 것처럼 질주하다가충돌이라는 방식을 통해 가상과 현실을 가로지르는 직접적인 흔적을 남기고자 했다면, ‘에서 김희천은 우회라는 방식을 반복하며, 이 동시대적이면서도 새로운 현실감각이 수용되는 양상을 구현해낸다가상, 가상의 가상, 가상 속의 현실, 현실 속의 가상으로 중첩된 현실에 대한 감각은 완벽하고 균일한 형태로는 수렴될 수 없다. 시선의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마지막 시퀀스는 대응이라도 하듯 불안하게 요동친다.


에리카는 서울이라는 세계에 뒤는 더 이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단언하지만, 탐정은 뒤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뒤는 미래에 있는 걸 기억해라는 말을 부연한다. 결국, 에리카 혹은 탐정은 더는 미래()가 없는 서울에서 미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소녀 탐정 에리카, 그리고 에리카와 비슷한 길을 먼저 걸었으리라고 예상되는 할아버지, 즉 탐정들은 실종되거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애매한 위치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애매한 위치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잡고 있던 의 화자, 순례자조차도 의문의 으로 워프되면서, ‘-또는 탐정의 실패에 휘말려 든다. ‘의 화자가 이 의문의 집에서 설령 벗어날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 함정 혹은 현실에서 온전히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집은 그냥 건물이 아니집은 버려져도 저주는 영원하기 때문에, 이제는 시간과 공간 또는 현실과 가상의 싱크가 어긋난 채로 현실을 감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새삼스럽지만 영원한 저주에 정말로 미래()가 없는 지 판단하는 것은 순례자의 마지막 임무일 것이다.




사진 제공 : 두산갤러리




  1. 이혜원, 「서사의 귀환 : 1990년대 이후 미디어 아트와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영화적인 재연」, 『현대미술학 논문집』, 16권 2호, (2012), pp.196-198. [본문으로]
  2. 댓글에서 나온 피드백을 바탕으로 문장이 일부 수정되었습니다. (2018.5.20) [본문으로]
  3. 곽영빈, 「‹썰매›의 평면, 평면의 썰매: 김희천에 대한 노트」, 『리깅(Rigging)』, 서울: 프레스룸, 2017, p.200. [본문으로]
TAG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