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기 쉽지만 무너지지 않는, 권세정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부서지기 쉽지만 무너지지 않는

권세정,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인사미술공간, 2019.4.19 – 5.18

 

글 조은채

 

권세정, '½ 커뮤니티', 카페트 타일, 50×50cm, 2019

끝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이 모호하고 분절된 제목을 이해하기 위해서 끝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이야기가 이야기가 되는 것은 끝이 알려졌을 때”이고 신데렐라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유리구두를 잃어버려야만 했다는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을 떠올리면서.

 

 권세정의 첫 번째 개인전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은 작가의 작업 경향을 전반적으로 아우르기 때문에 전시의 끝, 다시 말해 결론을 찾기는 쉽지 않다. 서문을 살펴보면 이번 전시의 키워드가 ‘엄마(혹은 어머니, 여성)’, ‘피해자의 이미지’, ‘늙은 개, 밤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인사미술공간의 지하와 1층 그리고 3층을 오가며 그리고 회화와 영상, 조각과 설치 등의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이 전시에는 앞선 키워드로는 묶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도통 그 뜻을 알 수 없는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이라는 제목만 보더라도 파편적이라는 형용사를 떠올리게 되듯이 말이다. 제목은 전시의 시작으로만 여겨지곤 하지만, 전시의 모든 요소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결론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게임 더 심즈(The Sims) 시리즈의 NPC이자 전시의 제목인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혹은 아그네스 크럼플보텀(Agnes Crumplebottom)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

 

 

아그네스 크럼플보텀 혹은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더 심즈 시리즈가 2000년에 처음 출시된 이후로 아그네스 크럼플보텀 역시 거의 20년 동안 심즈 세계에 등장해왔다. 아그네스는 회색 옷을 입은 노년 여성의 모습으로 항상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등장하는,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NPC(Non-Player Character)이다. 모든 NPC가 우편물을 배달하거나 도둑을 잡는 것처럼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심즈 속 세상에서 아그네스는 홀로 그의 강퍅한 성미를 뽐내는 것처럼 보인다. 아그네스에게 주어진 역할은 공공장소에서 애정표현을 하는 다른 캐릭터에게 달려가 가방으로 그들을 냅다 후려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아그네스의 이 역할 수행을 도중에 막거나 피하지 못한 채 그냥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다. 타인의 연애 행각에 대한 아그네스의 프로그래밍된 폭력을 과연 감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심즈 속 NPC 중 유일하게 먼저 다가와서 분노라고 부를 만한 감정을 자발적으로 표출하는 것 같다. 이러한 아그네스는 게임 속 세계에 갇혀 20년간이나 그 안을 끝없이 떠도는 악령처럼 보일 법 하나, 사실 악령만큼 두렵고 섬뜩하다기보다는 플레이어의 영향력 밖에 있기 때문에 다소 거슬리고 불편한 존재에 더 가깝다.

 

 왜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아그네스 크럼플보텀부터 시작해야 했을까? 권세정이 아그네스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사실 전시에서는 캐릭터 자체보다는 크럼플보텀이라는 성을 번역한 ‘부서지기 쉬운 바닥’이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이 개념이 아그네스의 캐릭터 혹은 캐릭터성과는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심즈 속 세계에서 아그네스 크럼플보텀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권세정이 작업 소재로서의 어머니, 밤세, 여성, 혹은 이미지 자체와 연관되는 방식과 유사하다. 언뜻 권세정은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을 통해 어머니 혹은 여성 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강아지 밤세를 경유해서 노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피해자의 이미지가 어떻게 흥밋거리로 유통되고 있는지를  지적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시를 더 들여다볼수록 이 첫인상과는 다른 무언가가 드러난다. 심즈의 플레이어가 아그네스의 조건반사적인 폭력에 개입하지 못한 채 그저 관찰했듯이 권세정 역시 어딘가 한 걸음 물러나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밤세, 어머니, 여성, 혹은 피해자의 이미지를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소재로 사용하지 않는다.

 

 

 

권세정, '232CB54A51A63D4501.jpeg', 2018-2019

 

권세정, '232CB54A51A63D4501.jpeg'(부분), 2018-2019

 

각도와 시야의 문제

 

 심즈의 플레이어는 NPC인 아그네스를 결코 플레이할 수 없고, 따라서 아그네스의 속마음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알 수 없다. 심즈는 플레이어에게 지금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성격과 야망, 추억이나 속마음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간명하게 정리해서 보여준다. 어쩌면 이 게임은 어떤 인물을 몇 가지 설정값으로 단번에 파악할 수 있으며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추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플레이어를 안심하게 하고 때로는 만족하게 하는 이 시야각은 아그네스를 볼 때는 허용되지 않는다. 아그네스를 보이는 그대로 고집스럽고 불평이 많은 노인으로만 여길 수도 있다. 혹은 주어진 각도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캐릭터에 관해서 마음대로 넘겨짚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시에서 권세정이 어머니와 밤세, 여성, 그리고 피해자의 이미지를 대하는 방법은 주어진 각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아그네스 크럼플보텀이라는 캐릭터를 다시 보려는 시도와 유사하게 느껴진다. 발화의 이면을 넘겨짚거나 세부적인 차이를 지우고 하나의 이해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리는 대신, 권세정은 관찰하고 또 수집하며 대상의 불가해하거나 미처 포착할 수 없었던 지점을 낱낱이 드러낸다.

 

 예컨대 2층의 영상 작업 '리액션'(2019)을 통해 작가의 어머니를 마주하게 되는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리액션>은 어머니의 몸에 부착된 카메라의 시각을 담고 있는데, 작가는 촬영의 진행 방향을 미리 정해 놓거나 녹화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 영상에서는 집의 구조, 다른 가족의 반응, 어머니의 일상 등 어머니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정작 어머니의 얼굴이나 표정을 볼 수는 없다. 플레이어의 시야각에서 아그네스 크럼플보텀의 속마음을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작가는 '리액션'에 어머니의 표정이나 얼굴을 담을 수 없는 각도를 선택한다. 공백으로 남겨진 어머니의 모습은 관객이 어머니를 하나의 이미지로 환원할 수 없도록 만든다.

 

 1층의 회화 연작 '232CB54A51A63D4501.jpeg'은 웹에서 무분별하게 공유되고 구경거리가 되었던 미제사건의 여성 피해자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이 사건에 대한 분노에서 작업을 시작했지만, 왜 그것이 문제인지 직접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원본 이미지를 실물 크기로 확대해 그 해상도를 현저히 낮춰버리고, 이를 다시 800개로 쪼갠다. 원 상태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워진 이 이미지들은 작가에 의해 손수 덧그려져 32장의 그림으로 탈바꿈하여 조금씩 틀어진 각도로 배치된다. 이미지 속의 대상이 한눈에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구조로 구현된 것이다. 피해자의 이미지는 인터넷 상에서 그저 유희거리인 것처럼 조각났지만, 오히려 작업 '232CB54A51A63D4501.jpeg'에서 32장의 이미지 조각은 피해자의 이미지를 단번에 간파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으로 대하는 작가의 윤리나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전시의 지하 1층과 2층에는 '1/2 커뮤니티'라는 같은 제목의 다른 작업이 각각 놓여있다. 지하 1층의 '1/2 커뮤니티'의 경우 바닥에 깔린 카펫에, 그리고 2층의 경우에는 책과 벽에 여러 이미지와 텍스트가 인쇄되어 있다. 이 이미지와 텍스트의 출처는 여초 커뮤니티이다. 2층의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작업에서 관객은 인쇄된 내용의 강렬함에 압도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 내용에 동조하거나 가치평가를 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표면 너머의 의미나 의도를 지레짐작하지도 않는다. 웹상에서 작가가 이 이미지와 텍스트를 마주하게 된 각도 이상의 것에 대해 함부로 말을 얹지 않는 것이다.

 

 작가의 늙은 개 밤세는 '4.1kg', '어깨-팔꿈치', 그리고 '가슴-배'에서 조각 난 형태로 구현되어 있다. 이때 지하 1층의 우레탄으로 만들어진 '어깨-팔꿈치'와 '가슴-배'가 거의 투명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작가는 덩어리에 사포질하는 방식으로 밤세의 조형을 정교화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포질이 반복되면 될수록 밤세의 어깨-팔꿈치와 가슴-배는 더 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닿으려고 하면 할수록 밤세는 도리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버릴 것이다. 허락되지 않은 각도 너머의 것을 넘겨짚다가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권세정, '가슴-배', 2018-2019

 

 

크럼플보텀에서 부서지기 쉬운 바닥으로

 

 관객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도 했던 2층의 '동그랗고 빛나는 것'은 여러모로 이질적이다. 다른 작업이 최근 2년간의 작업이라면, '동그랗고 빛나는 것'은 2013년 작업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시의 세 키워드였던 어머니, 여성, 피해자의 이미지, 밤세와도 가장 관련 없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이질적인 작업은 어쩌면 이 전시의 제목이 ‘부서지기 쉬운 바닥’이 되게 하는 또 다른 시작이자 끝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이 단 채널 비디오에는 제목 그대로 하얗게 빛나는 동그란 것이 등장하는데, 얼핏 보면 움직이지 않는 달을 촬영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이 하얀 표면 위로 하루살이와 같은 곤충의 사체가 계속 쌓여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완벽하게 이상적으로 보였으나 실은 죽음으로 착실하게 이행하는 과정이었던 이 작업을 통해 허상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제목의 동그랗고 빛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전시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의 맥락에서는 왠지 여성의 연대와 공동체를 연상하게 하고, 권세정이 전시를 통해 공동체나 연대가 사실 허상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든다. 하지만 권세정이 허상이라고 여긴 것은 공동체와 연대라는 특정한 개념이라기보다는, 다른 해석의 여지를 차단하는 하나뿐인 결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전시의 주어진 키워드로도 포착될 수 없는 작업. '동그랗고 빛나는 것'은 이 전시의 총체성 역시 부서지기 쉬운 바닥 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넌지시 내비친다. 권세정이 관찰만이 가능한 각도를 유지하며 대상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결론짓지 않으며 만들어낸 이 전시의 토대는 오히려 그 부서지기 쉬운 속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변함없이 돌아오고야 마는 아그네스 크럼플보텀처럼.

 

 

 

 

사진 제공: 인사미술공간

 

 


  존 버거가 마르틴 프랑크 『하루 하루』에 부치는 팩시밀리 서문(1998)에서 인용. 존 버거, 김현우역, 『사진의 이해』, 서울: 열화당, 2015, 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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