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딛고 설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유영진의 두 전시

우리가 딛고 설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유영진의 두 전시

<캄브리아기 대폭발>, 인사미술공간, 2018.8.17-9.15

<Take Me Somewhere Nice>, 위켄드, 2018.11.17-12.16


글 곽현지


유영진은 두 달의 시차를 두고 열린 전시 <캄브리아기 대폭발>(인사미술공간)과 <Take Me Somewhere Nice>(위켄드)에서 ‘캄브리아기 대폭발’ 시리즈를 통해 오래된 건물에 기생하고 있는 부속체들을 생물에 비유하고 가상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며 서울의 미감을 탐구한다.


사전적 의미의 캄브리아기 대폭발(Cambrian Explosion)은 캄브리아기(약 5억 4100만 년 전부터 4억 8500만 년 전까지)에 다양한 종류의 동물 화석이 갑작스럽게 출현한 지질학적 사건을 일컫는다.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거치면서 생물들의 다양성이 크게 늘어났으며, 그 결과 현생 환경에서 나타나는 것과 유사한 형태적 및 생태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다. 작가는 다세대 주택 밀집 지역의 부수적인 구조물의 등장과 발전 및 변화를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는 지질학적 개념을 빌려와 설명한다.


<캄브리아기 대폭발>이 열린 인사미술공간에서는 기존의 사진 매체에서 확장하여 드로잉, 조각, 출판물까지 다양한 매체로 생명체를 다룬다. 작가는 이명법[각주:1]에 따라 생명체의 생김새와 기능에 따른 고유한 학명을 부여하는데, 라틴어로 ‘서울’을 의미하는 ‘세울렌시스(Seulensis)’로 시작하는 다채로운 이름을 가진 생명체를 볼 수 있다. 이것의 연장선상으로 위켄드에서 열린 <Take Me Somewhere Nice>는 3층 규모의 전시장인 인사미술공간과 달리 한 눈에 들어오는 방 하나의 크기에서 벽에 붙은 이미지와 동그랗게 구획된 설치물이 중심에 놓여있는, 단출한 모양새를 보인다.



<캄브리아기 대폭발> 전시 전경 (인사미술공간 1층)



느린 걸음으로 채집한 증거

상상을 해보았다. 노후한 건물의 부속물을 발견한 뒤 이를 작업의 제재로 삼으며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는 관찰자의 모습을. 혹은, 이 부속이 흰색일 때와 갈색일 때, 비가 올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고양이가 어슬렁거릴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시차를 감지하기 위한 관찰자의 순간들을. 전시에 등장하는 가상의 생명체들을 이명법에 따라 명명하고 군집으로서 범주화하는 과정을 떠올려보면, 그것을 위한 여정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도시공간을 경험하는 방식과 어긋남을 알 수 있다. 작은 생물들의 동시적 찰나를 대폭발로 단정 지을 만한 믿음은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


우리는 지도를 통하여 위치를 파악할 때 공간의 실체를 감각하지 않아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실체를 보는 것과 움직이는 것 사이의 연결고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내가 딛고 서 있는 공간에 대한 자각이 필요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유영진은 그가 구축한 생태계를 통해서 산책자의 경험을 되살리고 지도로서 압축된 시공간을 열어젖힌다.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을 추적하며 이것의 변화를 기록해내는 작업 과정은 시스템과 자본에 종속된 피상적인 공간이 아닌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몸을 소환한다. 국지적인 공간을 탐험하는 이 실천은 가상의 공간이 직접적인 접속을 대체하는 세계에서, 도시를 대면하고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야만 가능하다. 움직임과 생활권의 범위에 대한 재조정을 통해 창출되는 움직이고 접촉하는 몸이 일상과 미생물들의 꾸물거림을 포착하는 작업에 대한 성찰을 견인하는 것이다. 작가가 주목한 생명체들은 쉽게 자라기도 하지만 낡은 것을 쇄신하고, 빛나고 반짝거려야 한다는 미명 아래 쉽게 도려내 지기도 한다. 그 찰나의 순간들을 이어붙이는 것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하루하루를 반복해나가는 작가의 시간일 것이다.



고쳐 쓰고 갱신하는 과거

<캄브리아기 대폭발>과 <Take me somewhere nice>에서 선보이는 유영진의 작업은 개인이 도시공간을 경험하는 시간성 이외에도 도시가 감내해온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건축가 홍윤주는 저서 『진짜 공간』에서 실제 거주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종류의 생활 기술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거칠게 뒤엉킨 도시의 이면에 집중한다. 이를테면 유리 조각으로 만든 방범 장치, 천막 천으로 만든 물받이, 보온을 위한 스티로폼 상자 같은 것인데, 최소의 비용으로 당장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덧댄 것은 예기치 못한 형태를 낳는다. “이런 건물을 이야기할 때마다 ...(중략)... ‘오래됐는데 이렇고 저런 건물’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나?’”(p.192)


오래된 서울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질서와 공식이 작용하는 반듯반듯한 것들, 개발 주체가 명확한 것들은 쉽게 경계 짓고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도시가 빠르게 변화한다고 해서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동일한 속도로 나아가지 않는다. 변화에서 누락된 것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것들은 자연스레 마모되고 풍화된다.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한 곳은 뒤처지고, 가려지고 만다.


우리 도시의 내력을 떠올려 보자. 어떤 건물 혹은 어떤 공간이 계획되고, 지어지고, 사라지는 몇 차례의 변곡점이 있다. 특정한 시기에 비슷한 건물군이 나타나는 지역은 비슷한 시간성과 부속을 가지게 되는데, 유영진은 이것을 생물체의 대폭발로 유비한다.  누군가는 작가가 포착해내는 울퉁불퉁한 것들의 풍경이 익숙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생경하고 보기에 꺼려지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주목하는 생물체들은 최신 공법으로 고안된 세련되고 유행에 잘 따른 디자인이 아니라 통속적이고 저렴한 재료들로서, 난처한 상황을 급히 돌려막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아직은 철거되기엔 이르지만 실생활의 불편함을 일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거주자가 덧댄 흔적이다. 달리 말하면 공간의 지속성을 연장하고 반짝이는 미래를 지연시키는 수단인 것이다. 작가는 노후하여 고쳐 쓴 건물의 연장된 시간을 박제함으로써 우리가 떠올리는 매끈함과는 다른, 임시방편의 것들이 지배하는 또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캄브리아기 대폭발> 전시 전경 (인사미술공간 2층)



반-부감의 풍경화

유영진은 인사미술공간 1층에서 그가 포착한 사물들을 확대하여 제시함으로써 관객이 압축된 이미지로 대상을 마주하게 한다면, 2층 전시장에서는 이것들을 물화시킴으로써 관객이 자신의 눈 아래의 높이에서 관찰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인사미술공간 1층이 일반적인 미술 전시장의 문법을 따른다면, 2층 전시장 일부분은 마치 생물학 연구실같은 느낌을 준다. 다양한 방식으로 조형화된 오브제들을 응시하다 보면, 정말로, 별 볼 일 없다.


이런 임시방편의 세상을 주시하기 위해서는 계층화된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세계는 조감 혹은 수직의 이미지로 표상된다. 멋진 하늘과 그만치 솟아오른 건물들, 자연스럽게 소거된 인간의 흔적들 - 이 모든 것이 하늘의 관점에서 있지 않은가. 수직적 관점에서는 공간을 분할하고, 통치하고, 권력을 행사하기에 용이하며, 쉽게 내려다보고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우리는 자연스레 이런 시선을 체화한다. 반면에 작가가 생명체로 격상시킨 대상은 눈길을 가장 아래로 두어야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상 속 몸도 발견하지 못했던 가장 하층의 이미지는 우리가 관념적으로 상정하고 있던 도시의 부피에 비해서는 너무나 작고 낮은 것들이며 이런 생물들은 공간이 위계화되어있음을 떠올리면 없어져야 마땅하다.


조감이 새로운 규준이 된 오늘날 이렇게 생활과 친근한 시점은 낯설게 보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자신이 딛고 서 있는 곳에서 스스로와 밀접한 환경을 제안하며, 어떤 정보값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삶의 공간을 돌려준다. 그는 수직적 관점에 맞서 생명체들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남겨진 현실을 제공한다. 평평하고 기호화되지 않은 세계에서 나열된 것은 저런 미시적이고 하찮은 것이다.


<Take Me Somewhere Nice> 전시 전경 (위켄드)



또다른 세울렌시스(Seulensis)

흥미로운 점은 유영진이 제시한 이미지 속의 장소가 어디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체를 최대한 크게 확대한 사진의 배경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주거 환경으로서, 작품을 통해서 구체적인 장소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없다. 작가는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향한 여정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하며 기이하고 친숙한 부속들을 분류해나간다. 이런 ‘세울렌시스’들이 불러일으키는 오래됨에 대한 위상은 어느 특정한 지역의 의제라기보다는 곳곳에 산재한 것이며 보편적, 객관적인 층위가 된다. 한편 위켄드의 한가운데에는 동그랗게 경계를 지어놓은 설치 작업이 있다. 작가가 인사미술공간에서 생명체들을 건축물의 부속으로서 위치시켰던 것에서 나아가 위켄드에서는 이런 부속물들이 독자적으로 솟아있는 군집을 제안한다. 유영진이 앞서 명명하고 분류한 생물체 중 몇 개만이 소멸하지 않고 남아있게 될까?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 대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에 역행하여, 작가는 <Take Me Somewhere Nice>에서 이들의 존재를 은폐하기는커녕 독립적으로 성장하게 만들어 장소에 깃든 미시적이고 하찮은 생물체들을 주체화시킨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으며,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지나치게 비판적이지도 않은 채, 생명체에 대한 중립적인 온기를 드러낸다.


우리 주변의 모습을 프레이밍 해보자. 이렇게 선별적으로 택해진 풍경은 우리의 새로운 생태를 구성하게 된다. 성장하고 발전하는 곳은 우리 시야에 쉽게 들어오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기억에서 삭제되기 쉽다.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는 개념으로 유영진이 주목한 이 결절점이 되는 순간을 통해 우리가 사는 도시에 대한 양면성을 가늠할 수 있고, 기록되지 못한 나머지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화석을 통해서 당시의 자연과 생물의 역사를 유추하듯, 오래된 거주지에 남겨진 가상의 생명체들은 오늘날의 환경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이 생명체들은 공간화된 자본에 의해 대부분 제거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는 단단한 도시의 유약한 부속들을 조형화함으로써 도시에 대한 역사화를 선행적으로 수행한다. 유영진의 세울렌시스들은 조감의 시선과 거대한 볼륨에서 벗어난 오래된 도시의 주름을 응시하는 일일 것이다.




  1. 이명법은 생물 분류학에서 종(種)의 학명(學名)을 붙이는 경우에 라틴어로 속명(Genus)과 종명(Species)을 조합하여 나타내는 명명방식이다. 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e)가 창안한 방법이며 현재의 학명을 명명하는 방식도 이를 따르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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