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특집 04 - 캐릭터는 스스로를 말하지 않는다, 아이소 모모카 <내가 행한 폭력>


캐릭터는 스스로를 말하지 않는다

아이소 모모카, <내가 행한 폭력>, (TATARABA「나오나카무라」 2018)


글 콘노 유키(Yuki Konno)



캐릭터에게 마음이 있을까? 사실 캐릭터는 굳이 만화나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SNS 계정이나 육성 게임, 그리고 2차 창작물 등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캐릭터 뒤에는 창작물의 생산주체, 즉 작가나 플레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첫 질문에 대답이 어느 정도 나왔다. 캐릭터 계정을 통해 트윗을 올리고, 아바타를 만들어 모험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나’라고도 ‘나’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때 사람들은, 그 스스로를 캐릭터에게 반영한다. 따라서 캐릭터 자체는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복화술하듯이 그 대상에게 입김을 불어넣는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다. 캐릭터는 왜 만들어질까?


TATARABA「나오나카무라」에서 열린, 아이소 모모카(Momoka Aiso, 相磯桃花)의 개인전 <내가 행한 폭력>에서 작가는 애니메이션 게임의 캐릭터 설정에서 폭력(성)에 주목했다. 작가는 회화와 영상으로 캐릭터를 표현하여, 관람객은 그 인물상을 별 생각 없이 바라보고 흔히 게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인다. 이때 시각적으로 들어오는 캐릭터의 건전한 모습은 작품 제목을 볼 때 물음표가 쳐지게 된다. 예를 들어, ‘뭐 내가 괴짜스러운게 안 된다 이거지?......진짜 웃긴다…’, ‘모두가 이야기하는 의미가 나한텐 몰라, 내가 이상한건가?’라는 제목을 보면, 마치 게임에서 대화하다가 상대 캐릭터가 난처해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이때 관람자는 시각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이질감이 형상에 내포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이질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바로 폭력의 불명확한 소재이다. 어떤 대상이 당한 뒤에 폭력은 비로소 원인으로 자리 매겨진다. 따라서 사람들은 피해나 상처가 입힌 흔적을 통해서 폭력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작업에서 폭력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폭력당한 사실이 예술적 결과물을 통해 시각적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온전한 이미지를 보면서 관람객들은 폭력이란 단어와 작품의 연관성, 더 나아가 행위와 결과물 사이의 연결성을 고민하는데 이때 제목을 통해서만 고민을 풀 수 있다.


이 맥락에서 보았을 때, <내가 행한 폭력>에 드러난 작가의 관심사는 이전 작업의 연장선 상에 있다. 이번 작업에서 작가가 다루는 폭력은 가시화되지 않고, 반대로 이전 작업에서 폭력은 시각적으로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2015년 안과화랑(眼科画廊)에서 열린 <momoka exseeeeess!!>에서 작가는 애니메이션에 왜곡된 형상을 같이 보여준다. 거기서 인물의 신체 일부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거나 과격하게 비툴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상당히 기괴하게 나타난 모습에서, 관람자는 변형의 원인이 된 어떤 힘을 추측할 수 있다. 보기에 좋지 않은 일그러진 모습은 누군가에 의해 힘이 가해진, 달리 말하면 어떤 원인이 전제된 흔적으로서 나타난다. 이때 우리는 그 원인을 조정, 또는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momoka exeeeeess!!>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조정과 폭력을 당한 개체가 보는 사람이 당혹감을 느낄 만큼 작품에 왜곡된 형상으로 나타날지라도, 그 캐릭터는 관람자의 찌푸린 표정을 오히려 의아해할 정도로 아무 불평도 내놓지 않는다. 거기서 캐릭터는 스스로의 이상한 모습을 전혀 모르는듯 멀쩡하다. 폭력은 겪은 뒤에 비로소 따르는 원인이며, 이때 그 흔적은 결과물인 작품을 통해 전달된다. 2015년 전시에서 폭력의 흔적이 가시화되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단지 제목과 캐릭터의 미세한 표정을 통해서만 관람자는 폭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흔적이 시각적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근본적인 폭력의 소재마저 의문시된다.


momoka  exseeeeess!!, 3:10, 2015


<momoka exseeeeess!!>에서 관람객이 캐릭터에게 기괴하면서도 멀쩡한 모습을 보았다면, 이번 전시는 폭력이 멀쩡한 모습에 감춰져 ‘멀쩡함’에 물음표를 쳐 두게 만든다. 두 전시 모두 ‘캐릭터의 둔감함’이란 말로 공통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 마비상태는 한편으로는 재현으로, 그리고 한편으로는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왜곡된 형상에서 캐릭터는 일방적으로 주어진 폭력에 이미 둔감해졌고, 반대로 제목을 통해서만 단서적으로 전달되는 고통은, 그 캐릭터가 느끼는 바를 재현에서 찾아낼 수 없다. 이전 작업에서 폭력의 흔적이 왜곡된 형식으로 가시화되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관람자는 가시화되지 못한 부분에서 폭력성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형상만 보았을 때는 흔히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보여, 아무 이상도 느끼지 못한다. 이때 제목에서 내가 ‘범했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행한다’는 표현을 통해, 그리고 시각적으로 온전한 이미지를 통해 폭력성을 무의식적인 특성으로 보여준다. 그렇지만 여기서 가시화는 비가시성, 즉 폭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폭력 그자체를 재현하고 전달할 수 없는 사실 또한 포함한다. 이 캐릭터들은 폭력을 당했을까? 타자의 고통은 어디까지나 타자에게 머무른다. 이 사실을 예술작품에서 부각시키려면 작가는 형상을 왜곡해야 하는, 즉 스스로 폭력을 휘둘러야 되는 딜레마를 겪는다. 이번 전시에서 캐릭터가 겪은 폭력은 단어들을 통해서만 전달되며, 창조와 조작 사이에서 예술가가 겪는 고민 또한 보여준다.


캔버스 위에 고정되든, 영상에서 움직이는 모습으로 묘사되든, 캐릭터는 생명의 입김을 부여받는 조건 아래 조정된다. 이 맥락에서 영상작업 뿐만 아니라 회화 작업 또한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animation)의 본래 뜻인 ‘움직이지 않는 존재에 영혼을 불어넣어주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캐릭터를 만드는 것과 조작하고 내 마음대로 설정하는 것 사이를 시각적으로 구분 못하며, 서로를 구별하여 표현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폭력과 창조의 구별이 거의 근원적인 힘으로 예술작품에 동시에 작용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오카모토 타로가 “예술은 폭발이다”라고 한 마디 내놓았듯이, 예술 자체가 이미 폭력과 창조가 결합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작품에서 폭력을 다룰 때 형상에 나타나려면 작가가 폭력을 감수해야 되고, 반대로 형상에 그렇게 표출하지 못하면 내러티브나 언어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 따라서 이번 아이소의 작업은 숨은 폭력이 결국 작품 안에 은폐된 채, 오히려 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예술가의 난처함 또한 보여준다. 내가 그린다는 것은 폭력인지, 아니면 주장하고 싶은 내용의 표출인지, 혹은 창조적 행동인지, 그렇게 서로가 맞물리는 지점에서 생산자인 작가로서 겪는 어려움이 부각된다.


그래서 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캐릭터에게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대상을 만든 다음에 그 형상에게 마음과 기타 다른 요소를 내비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넓은 의미’에서 ‘좁은 의미’까지, 욕망의 실현 및 투영하는 대상으로 캐릭터를 바라본다. 여기서 말하는 투영은 전시공간을 찾아온 관객 뿐만 아니라 육성 게임을 하고, 포토샵으로 수정을 하는 현대인에도 해당된다. 내가 되고 싶거나 내가 갖고 싶은 이상형은 내가 실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만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창조행위가 욕망과 결을 같이 한다는 사실을 아이소의 작업에서 찾을 수 있다. 캐릭터는 스스로 말할 수 없다. 대신 캐릭터는 인간 주체의 욕망을 넌지시 말해준다. 사람들은 창조와 폭력을 같이 끌어안은 채, 때때로 과격하게 대상을 만들어내고 또 건드린다.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게 캐릭터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는 인간이야 말로, 아이소의 이전 작업에 나타난 왜곡된 모습일 수 있다.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시각을 비롯한 다른 감각기관이 증대된 캐릭터, 그것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스스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momoka  exseeeeess!!, 3:10, 2015 이미지 출처 (http://aisomomoka.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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