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껌 희망, 최윤 <하나코, 윤윤최, 최윤 개인전>

<하나코, 윤윤최, 최윤 개인전> 전시전경




풍선껌 희망

최윤 <하나코, 윤윤최, 최윤 개인전>, 아트선재 프로젝트 스페이스, 2017.10.10 - 10.29


글 이상엽


 지난해 10월에 열렸던 최윤의 개인전 <하나코, 윤윤최, 최윤 개인전>(아트선재센터, 2017)에서 선보인 영상 작업 ‘하나코와 김치오빠 외 연속재생’의 클립 영상 한 부분에서 허허벌판의 논밭에 선 최윤은 두손을 확성기 삼아 이렇게 외쳤더랬다. “00아 우리 행복하자! 야 우리 행복하자! 우리 모두 행복하자!” 최윤이 외친 행복은 조급하고 간절하게 입밖으로 나와 공중에 연약한 메아리를 만들다가 이내 사라졌다. 2017년 가을에 열렸던 이 전시를 2018년이 시작하고 음력으로 새해를 맞는 즈음에 불러오며, 최윤이 외친 어떤 추상적이고 초점 나간 단어 ‘행복’과 그 분위기와 닮은 ’미래’, ‘희망’ 같은 단어들을 묶어 공중으로 띄워 올려 본다.  



1. 풍선껌 희망

 최윤의 개인전이 열렸던 아트선재센터 1층 공간(아트선재 프로젝트 스페이스)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커다랗게 세워 둔 가벽에는 경쾌하고 쨍한 장면을 연출하는 해바라기 풍경 이미지가 붙어 있다.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는 푸른 하늘과 그 아래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선 무수한 해바라기 무리의 풍경 이미지를 훑고 나면, 벽의 오른쪽 끝 사선 방향으로 일출 장면을 담은 구형 핸드폰과 진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정성스럽게 목례를 반복하는 마네킹이 서 있다. 최윤이 전시 공간에 배치한 앞선 일출 이미지, 한복을 차려 입은 마네킹의 인사, 푸른 하늘 아래 햇볕을 가득 받고 피어난 수많은 해바라기 이미지 등은 한국 사회 풍경 일부를 이루는 낯익은 이미지이자, 긍정적인 방향의 ‘미래’와 ‘희망’을 그리기 위한 목적으로 생산된 그럴싸한 이미지들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 없지만 어쩐지 새로운 날을 기대하게끔 불어 넣은, 뭐랄까 풍선껌으로 풍선을 만들 때 부풀어오르는 크기와 두께 정도의 허술하고 또 금방 푸욱 꺼지는 기분을 닮은 희망 말이다. 풍선껌의 풍선을 닮은 허술한 희망의 이미지, 그런데 이 이미지들이 할당받은 희망이란 건 또 풍선껌의 짧은 생애처럼 참 보잘 것 없게 느껴진다. 귀엽게 포옥 부풀어 올랐다가 푸욱 꺼지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단물을 잃고 본래 감싸여 있던 종이 껍질로 둥굴게 말려 들어가 버려지거나, 운이 조금 안 좋다 싶으면 길바닥에 퉤 내뱉어져 또 다른 운 나쁜 운명의 발에 찐득하게 달라 붙어 형편없는 임종을 맞게 되는 것이 바로 풍선껌의 부푼 풍선에게 허락된 결말이다. 어떤 경로로든 겨우 그저그런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앞서 최윤이 가져온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희망이 풍선껌을 닮았다는 기분은 비단 풍선껌의 운명이 그저 그렇다거나, 그 이미지들이 그저 그렇게 허술하다는 지점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모든 게 결국 우리 앞에 놓인 미래의 축소판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을 자아낸다는 데서 추상적인 우울감이 겹쳐 온다. 



2. 누추한 분이 귀한 곳에

 다시 해바라기 풍경으로 돌아와서, ‘창문그림액자 B타입-따사로운 햇빛 아래 해바라기와 마우스’(2017)의 이 해바라기 이미지가 얼마나 두루 사용되는 이미지인지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하나코, 윤윤최, 최윤 개인전>을 보고서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아주 익숙한 장소에서 해바라기 이미지와 뜻밖의 조우가 이루어졌다. 다시 만난 해바라기 이미지는 전시장에서 본 것의 1/100 정도 크기의 축소판 이미지로, 우리 집 현관 두꺼비집 뚜껑 위를 살포시 덮고 있었다. 누전차단기 겉면을 덮은 이 이미지는 빌라 복도 계단을 오를 때도 마주치는 이미지이고, 어쩌면 다른 누군가의 집이나 어떤 이의 컴퓨터 모니터 바탕화면, 주목해 찾기만 한다면 음식점 벽면이나, 상가 건물 어딘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인테리어용 이미지다. 지극히 통속적이고 여기저기 널린 이 이미지는 어쩌다 한정판과 특별함을 그 어떤 장소보다 애호하는 공간인 미술관에 들어와 팔자에 맞지 않는 예술 작품 행세를 떠맡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최윤이 택한 앞선 이미지들에게 미술관이란 공간은 꽤나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일지 모르겠다. 최윤은 거리에 널린 흔한 이미지들을 이전의 작업에서도 여러 번 재료로 가져와 사용해 왔다. 이전의 작업 몇몇을 살펴보면, 길을 걷다 숱하게 마주치는 건물 외관이나 공공장소에 도배된 구름모양 스티커 벽지들을 찾아 찍은 ‘구름 쉽게 찾기’(2013), 일명 1000원숍으로 불리는 다이소에서 파는 장미 모양 벽지용 스티커로 미술관 벽면을 뒤덮은 작업 ‘벽 스티커-스스로 접착 할 수 있는 벽 장식’(2014), 현관에 걸어 두고 파리를 쫓는 용도로 사용되는 문발을 가져와 걸어둔 작업 ’파리문발’(2016) 등이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최윤은 이전 작업들과 비슷한 재료들로 새롭게 선보인 작업들을 가리켜 ‘찌꺼기 이미지’라 명명했다. 누추한, 통속적인, 쓸모없는, 버려질, 조잡한 이미지들을 둘둘 묶어 이름붙인 ‘찌꺼기 이미지’는 최윤이 과거에 선보였고, 지금 선보이고 있고, 앞으로도 선보이게 될 이미지들이다. 최윤은 이런 누추한 이미지들을 이 귀한 곳 화이트큐브에 왜 데려왔던 걸까? 아무래도 최윤은 누추한 이미지나 미술 작품이나 사실 별로 다를 게 없으며, 서로의 자리가 길바닥과 미술관으로 분리되어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 같다. 그 대답을 유추하는 통로로 최윤의 이전 작업 ‘오늘날의 미술은 크리스마스 트리인가?’(2015) 속으로 잠시 접속해 보기로 한다. 앞의 작업에서 최윤은 미술 작품의 위치와 크리스마스 트리의 위치를 동일선상에 놓고 시간을 들여 고개를 갸우뚱거려 본 것 같다. 최윤이 갸우뚱거리며 저울 달아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미술작품은 크리스마스 트리보다 뛰어난가? 미술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제공해주는 것만큼의 만족도를 제공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만큼도 못하는 게 아닌가? 크리스마스 트리정도의 만족감을 관객에게 제공해 줄 수 있다면 그건 좋은 미술 작품인 게 아닌가?” 이와 비슷한 고민은 작업 ‘안팔리는 정성’(2015)에서도 이어지곤 했다. 최윤은 우연히 방문한 한 와플가게의 주인으로부터 다음의 이야기를 듣는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와플 만들기와 종이학 접기밖에 없어서요.” 종이학과 와플을 함께 팔던 가게의 주인은 지퍼백에 종이학 100개씩을 넣어 진열해 두고, 종이학을 접어내던 손으로 와플을 만들었다. 그런데 최윤이 가게에 다시 방문했을 때 그곳은 ‘롱플’이라는 당시 유명세를 타던 와플가게로 바뀌어 있었고, 롱플을 먹은 최윤은 체해버리고 만다. 최윤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미술을 비교했던 것처럼 종이학을 만들던 와플가게 주인과 본인의 위치를 비슷한 즈음에 놓고 감정이입을 했던 것 같다. ‘비주얼이 예술’이라는 롱플을 먹고 체한 최윤은 롱플뿐만 아니라, 롱플을 닮은 멋지고 훌륭한 미술이라는 입에 안 맞는 것을 먹고 소화하려고 애쓰다가 체한 경험이 있었던 게 아닐까? 

 최윤이 설정한 상황으로 미술관에 들어선 찌꺼기 이미지들을 '왕자와 거지' 이야기 비유로 각색해 본다면, 왕자와 거지가 서로의 옷을 바꿔 입어 보는 역할극 중 거지가 왕궁을 차지한 사이에 하필 왕권 교체가 이루어져 거지가 왕좌를 차지하는 일이 발생하는 건? 아니면 화려한 왕궁이란 게 알고보니 모래로 지어진 터라 장맛비가 좀 내리더니 다 무너져 내려앉아 길바닥과 왕궁이 구분없이 섞여 하나되어 버리는 건? 그러니까 한낱 찌꺼기 이미지가 미술관 전체를 먹어 버린다거나, 사실 미술관 거기 뭐 별로 다를 것 없더라 차원의 이야기가 전개될 수 없을까 하는 것이다.      



3. 행복?하고 밝은? 미래?

 작가 박이소는 지금으로부터 15년전 즈음 목이 긴 인공조명 여러 대를 새하얀 가벽을 향해 비추는 작업 ‘당신의 밝은 미래’(2002)를 선보인 바 있다. 그로부터 2년 뒤 ‘우리는 행복해요’(2004)라는 작업에서 주황색 바탕 위 하얀색 글씨로 작업 제목의 문장을 새겨 넣은 대규모 간판 설치 작업을 진행했다. 과거 박이소의 두 작업 ‘당신의 밝은 미래’와 ‘우리는 행복해요’가 그랬던 것처럼, 최윤의 해바라기, 일출 이미지와 영상 속 "우리 모두 행복하자!"라는 외침이 우리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것만 같은 시점에 딱 외쳐질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까? 전혀 밝을 리 없고, 행복하지 않아서 그 말이 너무도 낯설고 귀중하고 또 슬픈 ‘행복’과 ‘미래’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행복하지 않은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간절하게 바라줄 수 있을까? 전시장의 해바라기처럼 빛을 기다리며 쭈욱 내민 우리의 고개 위로 태양은 따뜻한 빛을 오래도록 비춰줄까? 언젠가 ‘우리 모두 행복하자’의 희망에서 ‘우리 모두 행복해’라는 확언으로 답하게 될 날이 올까? 문장의 끝마다 새겨넣은 수많은 물음표의 연속이 아닌 주저없는 느낌표 하나로 문장을 끝낼 수 있을까!




사진: 최윤 홈페이지(yunyunc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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